국가 간 갈등이 올림픽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우정을 갈라놓지 못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시상식장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선수의 뜨거운 포옹이 어느 반전(反戰) 구호보다 강력한 감동을 선사했다.
평화의 손길을 먼저 내민 쪽은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소속 일리야 부로프(31). 그는 지난 16일 밤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 겐팅스노파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에이리얼 결승에서 동메달을 차지하고 시상대를 밟았다. 부로프는 2015년 국가 주도의 도핑 스캔들로 올림픽 국가대표를 구성하지 못하는 러시아에서 ROC 소속의 개인 선수 자격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부로프보다 한 계단 높은 시상대에 오른 은메달리스트는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올렉산드르 아브라멘코(34)였다. 아브라멘코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이 종목의 ‘디펜딩 챔피언’이다. 4년 만에 베이징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크라이나의 베이징 동계올림픽 선수단 ‘1호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아브라멘코는 베이징 시상식장에서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펼쳐들었다. 부로프는 이런 아브라멘코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부둥켜안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대치 속에서도 양국 사이에 남은 온기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는 최근 개전일이 지정될 만큼 팽팽한 대치 국면에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유럽 국가 정상들과 화상회의에서 16일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디데이’로 제시했다. 이 소식을 지난 12일 보도한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정보가 구체적이고 걱정스럽다”는 자국 정부 관계자의 우려도 전했다. 다행히 러시아는 바이든 대통령의 예상과 다르게 전날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SNS에선 “부로프와 아브라멘코의 포옹이 전쟁을 막았다”는 감정 섞인 의견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에어리얼 결승이 열린 지난 16일 밤부터 17일 새벽 사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가능성으로 긴장감이 고조됐던 시간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부로프와 아브라멘코의 포옹을 “양국에서 고조된 긴장을 초월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