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내가 가해자라고?

입력 2022-02-13 19:09

악몽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퇴근하고 있었다.

“저는 서울중앙지검 형사1팀 수사관입니다. 전직 은행직원이 당신 명의의 대포통장 2개를 만들어서 사용한 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7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피해금액이 1억4000만원에 달합니다. 피해자들이 당신을 고소했어요.”

“보이스피싱, 아니에요?.”

“협조하지 않아서 발생하게 되는 일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 못 집니다. 곧 검사님이 전화 하실건데, 꼭 받으세요.”

1년 전에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주민등록증을 주운 사람이 명의를 도용해서 사기를 치는 바람에 경찰조사까지 받았던 곤란했던 경험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잃어버렸던 주민등록증 때문에 또 명의도용 사건이 발생한건가’라고 생각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서울중앙지검 김민석 검사입니다. 전직 은행직원 강지수라는 사람이 대포통장을 만들어서 피해를 발생시킨 사건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공문을 보내드릴테니 수사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카카오톡으로 서울중앙지검 명의의 ‘특급안건’ ‘수사협조의뢰’라는 제목의 공문과 함께 김민석 검사의 공무원증을 찍은 사진이 왔다.

“이 사건은 1급 기밀이기 때문에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야 합니다. 피해자 입증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 기밀을 누설하면 구속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신속히 협조한다면 대면 조사를 안 하고 약식조사로 진행해서 오늘 안에 끝날 수 있습니다. 약식조사를 위해 먼저 제가 보내드리는 프로그램을 앱스토어에서 다운받아 깔고 코드번호를 불러주세요.”

김민석 검사가 시킨 프로그램을 다운받고 코드번호까지 건네주긴 했으나 뭔가가 찜찜해서 서울중앙지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봤다.

“거기 서울중앙지검 맞아요?”
“네. 맞습니다.”

이번에는 금융위원회 직원이라고 밝힌 이동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민석 검사와 함께 대포통장 사기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당신의 계좌에 금융제재를 걸어놨는데 확인해야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사에서 카드대출한도를 조회해서 최대한도로 대출을 실행해주세요. 대출 실행 기록을 남겨야 나중에 국가에서 보안계좌로 표시하고 피해액을 변제해줍니다. 이런 대출기록은 조사가 끝나면 모두 삭제되고 자산은 복구됩니다.”

이동훈이 시키는대로 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금융 제재가 걸려있으면 대출 실행이 안 되어야 하는데, 모두 대출이 되었습니다. 이건 큰 문제인데, 금융기관에서도 당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어 제재가 걸려있어도 대출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따라서 불법자산을 인출해서 지폐일련번호인 CMN코드를 확인하고 이런 지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구멍을 뚫어 천공처리를 해야합니다. 그러니 현금으로 금융감독원에 인계해주세요.”

다음날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며 은밀하게 금융감독원 직원에게 현금 5000만원을 건넸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민석 검사는 또 다시 ‘불법자산 인계’를 이유로 현금을 건넬 것을 지시했다. 만약 현금을 건네지 않으면 조사가 완결되지 못하고 결국 구속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여기저기서 대출받고 부모형제, 지인에게 빌려서 1억원이 넘는 현금을 건넸음에도 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했다. 김민석 검사에게 더 이상 건넬 돈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직접 피해자를 만나서 피해회복 절차를 진행하라’고 했다. 그래서 김민석 검사가 시키는대로 서울, 분당, 창원, 부산 등에서 초조해하는 누군가로부터 쇼핑백을 받아 주위를 경계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보이스피싱 신고가 들어와서 CCTV를 봤더니 당신이 범인이더라’고…

2006년에 국내에 처음으로 상륙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현재 피해자의 심리를 철저히 지배해 가해자로까지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언제까지 개개인에게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만 할 것인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