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마, 내가 요즘 암것도 기억못한다.” 우리 나이로 올해 99세, 백수(白壽)를 맞으신 시할머니는 ‘손주며느리가 명색이 기자인데 인터뷰 한번 해주시면 안 되느냐’는 농 같은 부탁에 손사래부터 쳤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단 생각이 든 건 문득 그의 삶이 한 시대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거의 100년을 꼬박 살아온 내 시할머니의 삶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바램은,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이어졌다. 일년에 한 두번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는 같은 말,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횟수가 확연히 늘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할 기회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할머니는 2020년 3월 대구·경북지역 코로나19 확산기 때 지인을 통해 감염됐다 완치돼 당시 기준 최고령 완치자로 조명받았던 청도 할머니, 황영주씨다. 당시 97세로 초고위험군이었던 할머니가 포항의료원으로 긴급 격리 이송될 때만 해도 가족들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까지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적처럼 2주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건강히 돌아왔다. 경북 청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희망의 아이콘’이 된 할머니는 온갖 매체의 조명을 받았다. 명실상부 우리 집안의 최고 유명인이었다. 기자 손부의 ‘할머니 인터뷰’ 얘기는 그래서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할머니는 “아고 야야, 이젠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민망해하면서도 당신의 과거를 묻는 말에 하나둘 답하기 시작했다. 순서나 디테일은 허술했지만, 질문이 과거를 향할수록 답하는 목소리엔 힘이 붙었고 이야기는 많아졌다. 출생연도도 “모린다(모른다)”던 할머니는 “언니는 못 나왔어도 난 국민핵교(국민학교) 6학년까지 졸업했어. 그때는 일제 치하라, 내 이름은 고에이수. 영주가 에이수거든”이라고 똑똑히 말했다. 주민등록상 1924년생인 할머니 기억에서 숫자는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시절만큼은 고스란히 남은 셈이었다.
할머니는 “그 시절 여자가 내맨큼 배운 사람도 없었어. 내가 그래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진 않자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저기(현재 매일 나가는 노인주간보호센터) 나가도 나(나이)가 젤 많은데 빠지질 않아. 젊은 사람들이랑 대화해도”라며 껄껄 웃는 할머니 목소리엔 그때의 배움이 지금까지 인생을 버티게 해준 힘이라는 듯, 뿌듯함이 깔렸다. 할머니는 특혜를 누린 것처럼 자랑했지만, 편히 다닌 학교는 아니었다. 학교는 당시 할머니 집에서 멀었는데, 때문에 “학교 앞에서 동생들 데리고 자취”하면서 다녔다고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민학교(소학교)는 초등학생에 해당한다. 학교를 늦게 갔다 쳐도 10대 초반 정도였을 나이의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대신, 동생들을 돌본 거다.
이후 열아홉에 시집을 간 할머니는 서울 미아리고개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평생 경북서만 살아온 줄 알았던 할머니의 서울 생활 얘기에 놀라자 할머니는 뭐가 대수냐는 듯 “할애비(할아버지)가 큰 회사에 다녔잖아. 회사가 거 있으니께 서울로 왔지”라면서 “내가 그래도 센수(센스)가 있어 (잘살았다)”라고 했다. 격변의 시기, 낯선 서울생활 쯤은 당연히 받아들였고 잘 살아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서울살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째 난리 때” 할머니는 경북 군위군 고향 친정으로 내려갔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한 번 함락됐던 서울을 되찾았다 이듬해 1월 다시 빼앗겼을 때다. 당시 난리 통에 할머니는 남편을 잃었다. 뱃속엔 막내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는 “하나(큰 아들)는 손에 잡고, 다른 하나(둘째)는 등에 업고, 하나는 배에 있고 했지. 미아리 거기 굴에 오래 있었어. 낮에 들어갔다가 밤에 나오구 한 기라. 효창공원서도 있었고. 거서 한 집이 우릴 잘 챙겨줬었재”라고 덤덤히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홑몸도 아닌 채 계속 그리 지낼 순 없었다. 할머니는 피난길에 올라 어렵사리 친정집에 다다랐다. “왔더니만 어릴 때 친구가 (대구) 서문시장에서 5대째 장사를 한다는 기라. 걔가 석흰데, 얼굴도 기억 안 났지만 그래도 일단 찾아갔지. 살아야 하니께.” 다짜고짜 찾아간 시장서 친구와 할머니는 다행히 서로를 알아봤다. “딴 건 모르겠는데, 뻐드렁니(덧니)가 있었거든. 그게 있어서 확실히 알았지.” 할머니는 그 길로 친구네서 비단을 떼 내다 파는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거기서 보따리 지고 군위 하양(읍)와서 팔았지”라는 할머니 말에 지도를 검색하니 지금 길 기준 차로 약 한 시간, 걸어서는 6시간이 넘는 거리다. 할머니는 “난중에(나중에)는 내 가게도 채리고(차리고) 살았쟤”라면서도 “큰 거랑 둘째가 일찌감치 자기 앞가림해서 동생도 거두고 다 했다”며 홀로 아들 셋을 키운 공을 다시 아들들에게 돌렸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무게의 세월을 몇 안 되는 문장으로 전하면서도 할머니는 한번 울컥도 안 했다. 그저 “내사(나야) 진짜 맨주먹으로 여까지(여기까지) 왔다”며 “니한테 이리 다 말하니 속이 참 시원하다”고 웃었다. 때론 이를 악물고, 때론 숙명처럼 덤덤히 그 세월의 삶을 견뎌온 할머니의 맨주먹이 그제야 보였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