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비호감.’ 익숙한 이 수식어는 마치 20대 대선 캐치프레이즈 마냥 연일 미디어에 노출된다. 대선 후보들의 추문과 의혹, 네거티브 경쟁 속에서 서민을 위한 정책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동안 쉽게 볼 수 없던 정치 풍자는 풍년이다. 지난 2020년 6월 KBS2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폐지 이후 정치 풍자는 영원히 사라지는 듯했지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더 세고 매운맛으로 대중에게 돌아왔다.
SNL ‘밸런스게임’ 화제…‘표창장 위조 vs 불법 도박’
이번 대선 후보들은 본인이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일에 적극적이다. 폐지 4년 만에 쿠팡플레이로 복귀한 ‘SNL코리아’는 대선 후보와 중진 의원 등 유력 인사가 서로 출연하겠다고 대기표를 받는 핫한 프로그램이 됐다.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희화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OTT 플랫폼 콘텐츠의 주 마니아층이 20·30세대임을 고려하면 이런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12일 “이번 대선의 캐스팅보트를 쥔 20·30세대 표에 관심이 높아 정치권에서도 SNL이나 예능 출연에 적극적”이라면서 “20·30세대 자신도 적극적인 정치 참여 의지를 보이기 때문에 정치권이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SNL 시즌1에서 가장 이슈가 된 코너는 ‘주 기자가 간다’의 밸런스 게임이다. 해당 게임은 까다로운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한 가지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지난달 8일 출연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표창장을 위조한 딸과 상습적으로 도박하는 아들 중 한 명을 꼭 키워야 한다면 누구를 고르겠냐”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도 죽는 질문”이라며 당혹스러워했다. 해당 질문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표창장 의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장남의 불법 도박 의혹을 모두 비꼰 것으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대선 후보들을 패러디한 시즌2의 오프닝 하이라이트 영상은 조회수 200만을 기록하며 정치 풍자에 목말랐던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줬다. 약 4분 분량의 오프닝 코너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연기한 배우 김민교는 말을 할 때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도리도리’ 제스처를 하며 “아드님이 PC방에서 뭐 걸고 그런 걸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비꼬았다. 윤 후보 배우자 김건희씨를 연기한 배우 주현영은 단발머리 모양을 한 채 “문화센터에 한 번 나갔다. 그것도 나가긴 나간 거니깐”이라며 학력 위조 논란을 언급했다.
다만 대선 후보들이 풍자의 대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20·30세대의 표를 실제로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성철 정치평론가는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후보들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대중 호감도를 높이면서 다가가기 쉽게 만든다”면서도 “젊은 세대에게 부드러운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딱 여기까지다. 인기 영상이나 콘텐츠를 보고 싫어하던 후보를 갑자기 지지한다거나 표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너 팬티는 파란색이지?”…터졌다! 개그맨 정치썰전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은 예능에서도 인기를 보장하는 단골 소재가 됐다. 최근 방송인 김구라가 진행하는 웹예능 ‘구라철’에서 좌파, 우파 성향의 개그맨 논객이 출연해 토론을 진행한 ‘하자토론’ ‘좌파VS우파, 현피 현장’ ‘스우파보다 재밌는 좌우파’ 등의 영상은 평균 조회수 70만회를 기록했다. 해당 영상에는 대선을 앞두고 누구를 찍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지상파 토론 방송보다 유익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댓글이 적잖다.
지난달 28일 올라온 영상에서 우파 논객으로 나온 개그맨 김영민은 “국민의힘이 얼마나 대단한 정당인가. 내부적으로 계속 싸우지, 단합도 안 되지, 가치도 흐려지지. 그런데 이만큼 지지율이 나온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보 논객으로 나온 개그맨 강성범씨가 “너 빤스는 파란색이지?”라며 사실은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냐고 놀렸다. 이에 구독자들은 국민의힘 내부를 저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우파가 필요하다며 너무 유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올라온 영상에선 강씨가 보수 논객으로 나온 개그맨 최국과 급등한 부동산 가격 주제를 두고 성역 없는 대화를 나눴다. 강씨가 “미국 부동산은 가격이 더 올랐다”고 하자 최씨는 “한국 보수 공부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뭔 미국이냐”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강씨는 “원래 보수들이 유럽 선진국 비교하고 그런다”고 답했다. 이에 일부 구독자들은 ‘매번 저 멀리 유럽의 어느 나라, 선진국, 생뚱맞은 나라 통계 가져다 쓰는 국회의원을 돌려서 비판했다’라며 진영을 초월한 정치 비평이라는 감상평을 남겼다.
대선을 소재로 한 예능프로그램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만큼 정치를 직설적으로 다루는 미디어 콘텐츠가 부족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이다. 장 평론가는 “시사 풍자에 대한 갈증은 항상 존재해왔고 이에 대한 수요는 누적됐지만, 최근엔 시사 관련 코미디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졌다”면서 “국민은 권력에 대한 풍자를 콘텐츠로 소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정치 풍자는 늘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알맹이 없는 풍자…‘정치 혐오’만 키울 수도”
이번 대선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정치의 예능화’는 양날의 검이다. 대중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긍정적 측면도 있는 반면 정치에 혐오 및 싫증을 느껴 아예 무관심한 상태로 돌아설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예능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정치적 소재는 특정 정치인의 스캔들이나 가십성 의혹 등 자극적인 소재다. 이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들이 오히려 정치인에 관한 부정적 인식만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예능프로그램에서 다뤄지는 정치 소재엔 정책이나 제도 개혁 같은 콘텐츠가 별로 없고 자극적인 스캔들 등을 주로 다룬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나라처럼 정치 혐오 현상이 강한 상황에선 오히려 정치 풍자가 정치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키워 정치 혐오가 번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김 교수는 대선 이후에도 정치 풍자에 대한 수요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투표율은 낮아지고 정치인에 대한 혐오 감정은 커지지만 정치 풍자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상당히 높다”며 “성역 없이, 제한 없이 표현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고 설명했다.
일각의 우려에도 정치의 예능화가 정치에 관한 관심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란 의견이 나온다. 장 평론가는 “정치적 이슈가 예능에서 소비되는 것은 일정 부분 긍정적”이라며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안 본다. 예능 형식이면 재밌으니까 일단 보게 되는데 보는 것만으로 정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