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0일 “강력한 분노”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직접 규탄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간 청와대는 대선 상황과 관련한 입장 표명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문 대통령의 격한 분노를 유발한 건 현 정부를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윤 후보의 발언 때문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문 대통령은 촛불 정부로서 개혁 과제를 온몸에 안고 살아오신 분인데, (윤 후보는) 정부를 별 근거도 없이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며 “문 대통령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통으로 부정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후보는 9일 공개된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고 답했다. 또 “문재인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9일 저녁 관련 기사를 직접 찾아 읽어본 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부적절하고 불쾌하다’는 입장 발표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윤 후보 발언을 두고 “통합을 해서 미래로 나가야 하는데, 보복 또는 증오·갈등·분열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페이스북에서 “어떤 후보도 ‘집권하면 전 정권을 수사하겠다’는 망언을 한 적 없다”며 “윤 후보만이 공공연히 정치 보복 속내를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이 후보 측은 사안이 대선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관측은 엇갈린다. 진보진영 지지층 결집에 속도가 붙는 동시에 ‘전 정권 심판’에 염증을 느끼는 중도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있다. 반면 ‘문재인 대 윤석열’ 구도가 짜여지면서 이 후보의 존재감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후보와 가까운 한 민주당 의원은 “아직 친문(친문재인) 지지자 중 이 후보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지지자들이 꽤 있다”며 “민주당 지지자 결집이 더 견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중진의원도 “결국 중도층 지지를 확보하는 싸움이 될 텐데, 윤 후보가 중도층이 염증을 내는 정치 보복을 들고 나온 것”이라며 “통합과 미래라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이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전면 등판이 이 후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오히려 윤 후보 지지자 결집을 더 강화시키는 찬스가 될 것”이라며 “문 대통령이 전면에 나와버리면 이 후보의 존재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갈렸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 후보가 문 대통령 지지율을 다 가져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윤 후보의 이번 발언으로 민주당 결속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도층 중에 조금 더 품격 있는 정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윤 후보가 잘못했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보수와 중도층 내에 있는 반문 정서에 기름을 부어버린 격이 됐다”며 상황이 윤 후보에게 유리할 것으로 봤다. 최 원장은 “친문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서 50%가 넘는 정권교체 여론이 더 힘을 받게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현수 박세환 손재호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