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공언과 달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프랑스에 우크라이나 긴장 완화를 약속한 적 없다고 러시아가 반박했다.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리더가 아닌 프랑스와는 어떤 거래도 할 수 없다며 양국 정상회담의 의미를 축소했다. 몸소 러시아까지 날아가 푸틴과 장시간 회담을 하고 자신만만하게 성과를 자랑한 마크롱에게 대놓고 핀잔을 준 셈이다.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8일(현지시간)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푸틴 대통령이 (마크롱이 말한) 그런 약속을 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고 미국 비지니스인사이더가 전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어떤 거래를 할 만큼 나토 내에서 마크롱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페스코프는 영국 가디언에 “모스크바와 파리는 어떤 거래도 할 수 없었다”며 “프랑스는 유럽연합(EU)에서 선도적인 국가고 나토 회원국이지만 그곳의 지도자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구역에서는 아주 다른 나라(미국)가 책임을 지고 있다”며 “그런데 우리가 어떤 거래에 대해 대화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미국 말고는 담판 상대가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마크롱은 러시아가 지난해 가을 우크라이나 접경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한 이래 푸틴이 만난 서방 관계자로는 최고위급 지도자라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페스코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마크롱과 푸틴 간 모종의 합의에 대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듭 가능성을 일축했다. 상대국 정상의 발언을 이 정도로 정면 반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가디언은 “크렘린은 재빨리 자신이 양보했다는 (마크롱의) 암시를 비웃었다”고 해설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겠다며 전날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크롱은 크렘린궁에서 푸틴과 6시간가량 대화했다. 그는 다음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러 키예프로 넘어가는 비행기에서 취재진에게 자신이 구체적 안전보장 방안을 제안했고 푸틴으로부터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마크롱은 “나의 목표는 게임을 중단시키고, 긴장 고조를 예방하고, 새로운 관점을 여는 것”이라며 “이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평했다.
그는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도 푸틴이 우크라이나 내 긴장을 고조시킬 계획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크롱은 “이제 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을 진전시킬 가능성을 갖게 됐다”며 “러시아와 서방 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봤다”고 연쇄 정상회담의 성과를 자랑했다
이 자리에서 젤렌스키는 마크롱이 전한 푸틴의 약속에 대해 이미 회의적이었다. 그는 “나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며 “모든 정치인은 구체적 조치를 함으로써 투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내 우크라이나 포럼 대표 오리시아 루체비치는 푸틴이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을 상대로 일련의 ‘전략적 승리’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루체비치는 가디언에 “그의 전략은 (서방 간에) 이런 불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라며 “그는 이 위기를 아직 몇 달은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푸틴이 서방에 기적과도 같은 해법을 제시해 각국 지도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했다. 루체비치는 “‘내가 (해법을) 찾아냈다. 나는 유럽의 구세주다’라고 말하는 것은 각 서방 지도자에게 아주 매혹적”이라며 “그(푸틴)는 사람의 자기애를 갖고 논다. 마크롱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고 꼬집었다.
이날 러시아 해군은 지중해 훈련을 명분으로 대형 상륙함 6척을 흑해로 보냈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전했다. 군병력 등을 육지에 내리는 데 쓰이는 상륙함은 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를 침공할 때 동원됐다고 외신은 설명했다. 러시아 해군은 상륙함이 우크라이나 남쪽 해안선 권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벨라루스 상공에서는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러시아 측 장거리 전략폭격기 2대가 4시간 동안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러시아는 오는 10일부터 열흘간 벨라루스에서 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