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3일부터 강화의병 발굴에 나섰던 인천대학교(총장 박종태)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강화의병 30명을 발굴해 7일 강화군청(군수 유천호)에서 보고회를 연다고 6일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일제침략기 강화의병은 강화 출신 25명과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일본 군경과 의병투쟁을 벌였던 타지 출신 5명을 포함한 30명이다.
정부에서 의병 공적으로 포상을 시작한 1962년 이래 지금까지 강화 출신은 8명에 불과했는데, 이보다 3배가 넘는 의병 유공자를 발굴한 것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번 보고서에는 포상된 강화의병의 공적까지 정리해 소책자를 만들어 강화의병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것이 큰 의의가 있다.
이번에 발굴된 의병장과 의병은 김용기(金龍基)・이능권(李能權)・지홍윤(池弘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진(義陣:의병부대) 소속의 의병장과 의병이 대부분이다. 강화의병은 뭍에서는 이능권 의진, 바다에서는 김용기·지홍윤 의진이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이능권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해 남대문역에서 열차를 이용, 부산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지만, 결국 이준 특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했다는 소식에 의병을 일으켜서 강화도를 의병의 천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김용기 의병장은 황해도 배천 출신으로 시위대 기병 부교(副校)로 근무 중, 군대가 해산되자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거의한 박정빈(朴正彬) 의진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돼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강화·교동과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지홍윤 의병장은 강화 출신으로 강화진위대에 부교(副校)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제주도에서 전역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일제에 의해 1905년부터 강화진위대가 강화분견대로 축소된데다가 1907년 8월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의병을 일으켜서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 도서지방과 황해도 평산・배천・연안군에 이르기까지 김용기 의병장과 맹위를 떨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될 만큼 훌륭한 인물로 기록됐다.
일제는 강화의병 진압을 위해 러일전쟁 때 통보함(通報艦)으로 활약했던 군함 치하야[千早]와 사기[鷺]・우즈라[鶉]・하시다카[鷂] 등 쾌속 수뢰정(水雷艇)을 동원해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을 왕래하는 의병들의 나룻배나 어선을 공격했고, 뭍에는 육전대(陸戰隊:우리 해병대와 유사함)까지 파견하여 약 6개월 동안 의병 진압에 나섰다. 김용기·지홍윤 의진은 7척의 선단을 형성해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방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전개했으며, 이는 한말 의병사에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들 의병장 의진에서 활약했지만 아직 포상되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용기 의진의 금찰장(禁察長) 고재환(高在煥)・소모장(召謀長) 김장석(金長石), 이능권 의진의 참모 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지홍윤 의진의 고부성(高夫成)・김신명(金愼明)・장동섭(張東燮) 등이고, 강화도에서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의병투쟁을 벌인 의병장 김태의(金泰宜)・오윤영(吳允榮)・장인선(張仁善) 등이다.
또 발굴과정에서 강화군 하도면 주윤창(朱潤昌), 내가면 배영도(裵永道) 집에 의병이 금품을 강탈해 갔다고 인천경찰서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도 발견됐다. 이는 주로 이능권 의진이 총기 구입을 위해 강화군 재력가들에게 금품을 요청하고, 재력가는 금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이를 제공한 것인데, 일본 군경에 이 사실이 발각되면 이른바 “폭도 협력자”라 하여 엄청난 고초와 처벌이 따랐기 때문에 의병들이 요청한 금품을 가지고 갈 때는 재력가를 새끼줄로 묶고, 폭행을 가해 마치 강탈해 가는 형국을 만든 것이었다.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경인지역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 화보, 강화의병 현황, 강화의병 공적 포상자 공훈록,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강화의병에 대한 『통감부기록』과 『한국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칼라 4·6배판 126쪽 분량이다.
유천호 강화군수는 “그동안 강화의병이 엄청 많았다고 알려졌으나 그 사료를 발굴, 정리하지 못해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면서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강화 출신 의병뿐만 아니라 3·1독립만세의거, 국내외 광복활동을 했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발굴하고, 특히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공적도 제대로 발굴돼 하루빨리 포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강화군민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최용규 이사장은 “인천대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를 설립해 3년 동안 6차례 2828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한 바 있다”며 “곧 7차 422명을 포함, 총 3250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신청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
이어 “유천호 군수가 독립운동사연구소에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 발굴 의뢰한 것은 매우 뜻깊은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인천대 이태룡 독립운동연구소장은 “강화의병뿐만 아니라 3·1독립만세의거, 국내외 반일투쟁에 선두에 섰던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포상신청해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그것을 하나의 책자로 묶어내면, ‘강화독립운동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