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을 수리하러 갔다가 ‘고치느냐 사느냐’ 고민에 빠진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겁니다. 수리해서 더 쓰고 싶어도 비용이 새로 사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보니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거지요.
소비자는 수리 비용이 왜 이렇게 비싼 건지, 정말 꼭 필요한 부분만 고친 것인지 알고 싶어도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습니다. 비용을 싸게 부르는 수리업체에 맡기고 싶어도 ‘사설 수리를 받으면 품질보증이 안 된다’는 제조사의 말에 포기해버리고 말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국내에서도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요즘 핫한 수리권 이야기, [에코노트]가 쉽게 풀어드립니다.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 대체 뭐길래?
‘수리할 권리’는 말 그대로 소비자가 제품을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지금도 물건이 고장 나면 제조사의 공식 AS센터에서 수리받을 수 있지요. 그런데 제조사를 통해서만 물건을 고칠 수 있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제조사가 ‘부품이 없다’고 하면 원치 않아도 새 제품을 사야 하고, 고가의 수리비가 청구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 등이죠.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의도적으로 2~3년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의혹도 불거졌습니다. 업데이트된 소프트웨어가 옛 모델을 지원하지 않아 멀쩡한 기기를 바꿔야 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요즘 논의되는 수리 ‘할’ 권리는 기존의 수리 ‘받을’ 권리에서 한 단계 나아간 개념입니다. 소비자가 스스로 제품을 고칠 수 있는 권리, 제조사가 아닌 사설 수리업체에서 수리받을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구입 단계부터 수리가 용이한 제품,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살 수 있는 권리도 ‘수리할 권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제조사가 생산 단계부터 지속가능한 디자인으로 제품을 출시해야 한다는 ‘에코디자인’ 활성화도 수리할 권리와 함께 논의되고 있습니다.
한번 쓰고 버리는 스마트폰? 쏟아지는 전자 폐기물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의 권리를 증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비용을 아끼는 자원순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의 수리할 권리 법안은 ‘순환경제 실행계획’ 중 소비자 참여를 높이려는 방안에서 출발했습니다.
2019년 세계 전자폐기물은 총 5360만t으로 2014년에 비해 21%가 증가했습니다. 한국은 이 중 1.6%인 81만8000t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율이 적다고 느낄 수 있지만 1인당 폐기물량으로 따지면 15.8㎏, 세계 평균(7.3㎏)의 두 배가 넘습니다.
수리할 권리가 단지 스마트폰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전자제품에는 냉장고, 세탁기, TV, 컴퓨터 등 여러 기기가 있으니까요. 다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스마트기기의 교체 주기가 상대적으로 짧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전 [에코노트] 기사에서 다뤘듯 스마트폰에는 값비싼 금속 자원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자원이 재활용되지 못하고 2~3년마다 일회용품처럼 버려지니까요.
특히 요즘 스마트기기는 방수 등을 이유로 배터리 일체형 디자인이 많고, 특정한 도구 없이는 분해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휴대전화의 품질보증기간은 2년이고 배터리는 1년입니다. 부품 보유기간은 4년으로 다른 제품에 비해 기간도 짧습니다. 자주 쓴다는 건 파손되거나 고장 날 가능성도 크다는 건데, 가격이 비싸면서 수리는 어렵다 보니 수리할 권리를 이야기할 때 스마트폰이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겁니다.
‘한국판’ 수리할 권리,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수리할 권리는 EU, 미국, 프랑스, 호주 등에서 이미 법안이 제정됐거나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법안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이죠.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지난해 수리할 권리와 관련해 여러 법안이 발의됐는데요. 우선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은 순환경제라는 큰 틀에서 수리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비부품 제공, 수리 정보 제공, 안전한 해체 등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법안이죠.
국회부의장인 김상희 민주당 의원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내놨습니다. 이 법안은 휴대전화에 초점을 맞춰서 ① 휴대폰 제조업자가 합리적 이유 없이 수리에 필요한 부품·장비 등의 공급·판매를 거절하거나 지연하는 행위 ② 휴대폰 수리를 제한하는 소프트웨어 등을 설치·운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수리할 권리를 직접 명시한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을 대표발의하기도 했습니다. 법안은 소비자가 갖는 하나의 기본권으로 수리할 권리를 선언하고, 수리권을 보장받는 품목도 구체적으로 정했습니다. 또 수리할 권리 보장을 위한 제조사의 의무와 책임을 명시하는 등 수리권과 관련해 광범위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수리권은 대선 공약으로도 등장했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달 수리할 권리를 언급하며 “(제조사의) 수리용 부품 보유 기간을 확대하고, 수리 매뉴얼 보급 등으로 제품을 편리하게 고쳐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죠. 이 후보는 “수리권이 확대되면 수리·서비스 시장도 커져 새로운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참여도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며 “소비자 권리 보호와 생활폐기물을 줄일 수리권 보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인정보 우려? 가격 상승? 갈 길 멀지만… 피할 수 없는 수리권
수리할 권리를 법과 제도로 정착시키는 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개인이 스스로 물건을 고칠 때에는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사설 AS센터에서 수리를 받았을 때는 품질에 대한 우려가 생기죠. 특히 스마트기기를 수리하는 건 개인정보와 연결돼 있어 더욱 민감합니다. 우리가 더이상 쓰지 않는 휴대전화를 서랍 같은 곳에 보관하는 것도 여기에 담긴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니까요.
옛 모델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제조사가 오래 부품을 보관해야 하는데, 이렇게 부품 보유 기간을 늘리면 자연히 소비자 가격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수리를 위한 매뉴얼을 제공한다는 건 그만큼 기술 정보를 공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제조사의 반발도 심할테고요. 수리가 쉬워지면서 제품 교체 주기가 길어져 신제품 판매량이 감소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자원 순환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조건 새 부품이 아니라 중고 부품도 사용해야 하는데, 이런 부품 관리에 대한 논의도 필요합니다.
지난달 25일 강은미 의원이 진행한 ‘수리할 권리법 제정을 위한 입법공청회’에서도 이 같은 현실적 문제들이 언급됐습니다. “부품 보관과 수리 업체를 양성하는 부분이 같이 가야 한다” “사설 수리에 대해서도 보증이 필요하다” “수리가능성 지수 지침부터 시도해야 한다”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죠.
사실 수리권은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인 기업에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갈수록 수리할 권리를 제도화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기업이 해외 시장에 제품을 수출할 때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향후 입법 논의 과정에서 소비자는 물론 기업들, 관련 제도를 정비할 부처까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이유입니다.
지속가능한 제품을 만들어 쓴다는 건 곧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든다’와 같은 말일 겁니다. 잘 만든 물건을 구입해 고쳐가며 오래도록 쓰고 싶다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과한 욕심은 아니겠지요? 2022년, 올해가 수리권의 원년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보면 어떨까요.
‘환경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죠?’ 매일 들어도 헷갈리는 환경 이슈, 지구를 지키는 착한 소비 노하우를 [에코노트]에서 풀어드립니다. 환경과 관련된 생활 속 궁금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