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 연주자 천지윤, 전통과 동시대 사이를 횡단하다

입력 2022-02-03 07:00 수정 2022-02-03 18:13
해금 연주자 천지윤이 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는 올해 크레디아 클래식 클럽의 유일한 전통음악 연주자로 오는 9일 무대에 선다. 권현구 기자

줄임말이 일상화된 요즘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크클클’은 ‘크레디아 클래식 클럽’의 줄임말로 잘 알려져 있다. 클래식계의 대표적인 공연 기획사 겸 매니지먼트 회사인 크레디아가 지난해 시작한 크클클은 클래식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시리즈 음악회다. 매월 둘째 혹은 셋째 수요일 오전 11시 반에 열린다.

지난해 크클클이 크레디아의 대표 아티스트들과 해설자들이 함께 하는 렉처 콘서트 형식이었다면 올해는 주제를 ‘러브송’으로 정한 뒤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박현수의 사회에 다양한 연주자들이 참여하는 형식이다. 오는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2월 공연의 주인공은 해금 연주자 천지윤(40). 크클클이 함께 하는 아티스트들 가운데 유일한 전통음악 연주자인 그는 지난 1월 발매한 음반 ‘천지윤의 해금 : 잊었던 마음 그리고 편지’가 한국 현대음악의 거장인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곡을 해금 중심으로 재해석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통음악의 문법과 현대음악의 실험적 표현의 융합을 즐긴다. 천지윤을 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만나 27년에 걸친 음악 여정과 함께 이번 음반 중심의 크클클 공연에 대해 들어봤다.

우투리와 비빙에 참여하며 실험에 눈 뜨다

“해금은 매우 매력적인 악기에요. 크기는 작지만 누가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채로운 소리를 내거든요. 관객 여러분이 해금에 대해 좀 더 알도록 하고 싶어요.”

지난 2018년 천지윤이 영산회상 중심의 음반 '흐르고 흐르다'를 공연할 때의 모습. 천지윤 제공

클래식 애호가인 부모님 슬하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던 그는 엄마의 권유로 국립국악중학교에 입학해 해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활로 줄을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인 해금의 매력에 빠진 그의 기량도 빠르게 올라갔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 후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펼치는 선배와 동기들의 모습에 큰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한예종 연극원의 김광림·이상우 교수가 이끌던 극단 우투리에 2003년 합류해 2011년까지 함께 작업했다. 2002년 창단된 극단 우투리는 한국 전통연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작품들을 선보였고, 그는 이곳에서 악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작곡과 노래 그리고 움직임까지 했다.

“극단 우투리와 함께 국내는 물론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여러 연극제를 참여한 게 정말 즐거웠는데요. 무엇보다 연극인들과 작업하는 동안 저를 둘러싼 껍질이 한 꺼풀 벗겨졌습니다. 그동안 입시 위주의 연습과 전통 분야의 엄격한 격식만 따랐던 제게 연극인들의 격식 없는 모습이나 현장의 뜨거운 에너지는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극단 우투리에서의 작업에 이어 그는 뮤지션 장영규가 이끄는 비빙에 합류했다. 한국 인디밴드 1세대를 대표하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베이시스트인 장영규는 대중음악, 국악, 영화, 드라마, 연극, 무용 등을 넘나들며 작곡가, 음악감독, 프로듀서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범 내려온다’로 열풍을 일으킨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 겸 리더인 장영규가 전통음악을 동시대적 예술로 발전시키기 위해 처음 창단한 단체가 바로 비빙이었다. 2008년 창단된 비빙은 불교음악, 가면극, 궁중음악을 소재로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이는 실험적 작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각광을 받아 다양한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됐다.

지난 2019년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이 안무한 국립무용단의 '회오리'의 한 장면(위)과 당시 음악을 담당한 비빙(아래). 국립극장 제공

“장영규 감독님이 안무가 안은미 선생님의 작품마다 음악을 담당하시는데요. 안 선생님의 ‘바리’를 위해 해금 연주자를 찾고 있을 때 안은미 컴퍼니에서 작업하던 친구가 저를 추천해줬습니다. 오디션을 거쳐 ‘바리’ 공연에 참여한 이후 비빙에도 합류하게 됐죠. 비빙은 해외의 유명 페스티벌을 자주 다녔는데, 저는 출산 직전의 인도 공연을 빼고는 모두 참여했습니다. 비빙의 작업이 너무 좋았던 데다 재밌는 현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장 선생님이 음악감독을 맡은 다양한 영화, 연극, 무용 작업에 참여한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비빙은 2015년 이후로 신작은 발표하지 않고 국립무용단의 ‘회오리’ 등 과거 작품의 재연이 있을 때 동창회처럼 모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장 감독님을 만나 비빙에 참여한 것이 제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엄숙하고 정통적인 국악만이 아니라 실험적인 창작음악에도 눈을 뜨게 됐거든요.”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양극단을 오가다

한예종 학부와 전문사를 거쳐 이화여대 박사를 마치고 강단에 서고 있는 천지윤은 해금 연주자로서 전통음악과 현대음악, 전통과 전위의 양극단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그가 발표해 온 음반들 가운데 ‘관계항’ 시리즈는 그의 음악적 화두를 잘 보여준다. ‘관계항1-경기굿’은 그가 지영희류 해금산조 및 경기무악과 함께 장영규가 경기굿을 재해석해 작곡한 작품을 연주하며, ‘관계항2-백병동’은 현대음악 작곡가 백병동의 후기 작품을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성우와 연주했다. 또 ‘관계항3-시(詩)’는 현대시와 조선시대 가곡·가사·시조를 모티브로 작곡가 윤혜진, 장영규와 교류한 결과물을 담았다. 지난 1월 한국 현대음악의 거장인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곡을 해금 등 전통음악과 재즈의 협업으로 재해석한 음반 ‘천지윤의 해금 : 잊었던 마음 그리고 편지’도 결국은 ‘관계항’ 시리즈와 맥을 같이 한다.

“‘관계항’이란 제목은 이우환 선생님의 설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서 가져온 거예요. 이 선생님의 ‘관계항’은 돌과 철판이 마주 보는 작품인데요. 돌이 자연적이고 동양적인 것이라면, 철판은 서구적이고 산업화된 것을 상징하죠. 이 선생님의 작품 의도가 전통을 근간으로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제 생각과 너무나 잘 들어맞더라고요. 음악계에서 제 롤모델이 황병기 선생님인데요. 가야금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으면서 국악계의 새로운 모델이 된 황 선생님처럼 저도 해금을 통해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지난 2017년 천지윤이 음반 '여름은 오래남아' 발매와 함께 가진 동명 콘서트에서 연주하는 모습. 천지윤 제공

‘서재 콘서트’ 등 대중과의 소통에 나서다

전통과 실험 사이에서 음악적 영역을 넓혀온 천지윤은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인 편이다. 그는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꾸준히 알려 왔다. 2019년 1월부터 4년째 자신의 집 서재에 예술가와 작가 등을 초대해 음악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재 콘서트’는 그의 대표적 콘텐츠다. 독서 애호가이기도 한 그는 서재 콘서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최인아책방에서 ‘엄마의 책읽기’ 독서 모임을 이끄는 한편 ‘우리음악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다.

“비빙 활동을 하면서도 국악과 대중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국악이 살아남으려면 고정 팬층이 있어야 하는데, SNS를 통해서 무겁지 않게 대중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세상에서 단절된 듯한 외로움을 떨치고 싶었던 것도 있습니다. 당시 강의와 육아에 전념하느라 공연도 제대로 보러 가지 못하는 등 저만 정체된 것 같아서 막막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SNS를 활용해 연주 영상을 올리다가 점차 지인을 초청해 함께 연주하거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재 콘서트를 시작했죠. 서재 콘서트는 현재 팬들과 실시간 채팅이 되는 유튜브에서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서재 콘서트를 거듭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연결된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서재 콘서트를 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난 최인아 대표님의 권유로 독서 모임과 콘서트를 진행한 것은 저를 좀 더 성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책에 대한 그의 애정은 또 다른 독서 모임 및 글쓰기 모임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꼬박 1년간 아침마다 규칙적인 글쓰기 끝에 탈고한 에세이 ‘단정한 자유’를 크클클 공연 전날 발매할 예정이다. 그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써내려간 글들을 담았다. 에세이를 쓰는 동안 그동안의 상처들이 치유 되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출판사와 함께 텀블벅을 진행하는 등 노력 끝에 만들어낸 책을 통해 대중에게 해금 연주자 천지윤을 좀 더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12월 작곡가 김순남의 가곡을 노랫말 없이 해금·피아노·기타·클라리넷의 앙상블로 연주한 '잊었던 마음' 콘서트 장면. 천지윤 제공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