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 나달은 5시간 24분에 달하는 치열한 승부 끝에 세계랭킹 2위 다닐 메드베데프를 세트스코어 3대 2(2-6 6-7 6-4 6-4 7-5)로 꺾었다. 2009년 우승 이후 4번의 준우승(2012·2014·2017·2019)을 딛고 13년 만에 호주오픈 정상에 복귀했다.
더불어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2번 이상 우승하는 ‘더블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하며 본인의 21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자축했다. ‘빅3(나달, 로저 페더러, 노박 조코비치)’가 펼쳐 온 치열한 고트(GOAT·역대 최고 선수) 경쟁에서도 한발 앞서 나가게 됐다.
경기 초반 전개는 비관적이었다. 메드베데프는 마치 나달의 젊은 시절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재현하듯 경쾌한 풋워크로 랠리에서 우위를 점했다. 나달은 1세트 자신의 서브게임을 2번 연속 내주며 고전했고, 메드베데프는 강력한 서브를 앞세워 본인의 서브게임을 착실히 지켜 1세트를 쉽게 가져갔다.
2세트 분위기 반전에 나선 나달은 4-3에서 메드베데프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서브게임을 뺐긴 뒤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0-2로 끌려갔다. 강력한 스트로크를 바탕으로 상대를 잠식하는 경기 운용이 특기인 나달이 ‘서브 앤 발리(서브 후 네트 플레이를 펼치며 상대를 압박하는 전술)’에 나설 정도로 전술적 측면에서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2세트를 마친 뒤 대회 조직위원회가 알고리즘으로 계산한 우승 확률은 메드베데프가 96%, 나달은 단 4%에 불과했다. 3세트 전망도 암울하기 마련, 베이글 스코어(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6-0으로 끝나는 세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지만 나달은 반전을 일궈냈다.
2-3으로 추격하다가 닥친 브레이크 위기에도 자신의 서브게임을 지켜냈고, 관중들을 향해 ‘바모스(Vamos·가자)’를 외치며 호응을 유도했다. 과거 페더러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목전에 뒀을 때 본인이 받던 야유가 메드베데프에게 돌아갔다. 오히려 환호를 받는 상황이 된 나달은 더욱 힘을 냈다. 4-4에서 상대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며 기어이 3세트를 가져왔다.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열 살이나 젊은 메드베데프가 먼저 흔들렸다. 게임스코어 2-2에서 나달은 5번의 듀스 끝에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이후 메드베데프는 경기 전반 확실히 우위를 점해왔던 서브 이외에는 랠리에서 쉬운 찬스마저 놓치는 결정적 범실을 남발하며 스스로 무너졌다.
운명의 5세트. 서브권을 가진 메드베데프가 더블 폴트로 첫 포인트를 내주면서 대역전극의 서막이 올랐다. 기세가 오른 나달이 멋진 패싱샷으로 코트 구석구석을 찌르며 4세트 이후 발이 굳은 메드베데프를 공략했다. 하지만 메드베데프는 위기 마다 강력한 서브를 인코스로 꽂아넣으며 자신의 서브게임을 지켜냈다.
세트 중반 나달의 서브게임부터 슬슬 이변의 징후가 관측됐다. 그간 안정적인 리턴을 구사했던 메드베데프가 나달의 서브에 반응하지 못하고 포인트를 뺏기기 시작했다. 4게임까지는 팽팽하게 서브게임을 지켜냈지만 5게임 듀스에서 메드베데프가 날린 회심의 위닝샷을 나달이 다운더라인으로 받아치며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기적 같은 대역전이 목전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어느덧 5시간이 넘어서고 메드베데프는 그간 나달에게 점하던 체력적 우위를 상실했다. 6번째 게임은 이날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나달이 회심의 서브 앤 발리로 승부를 걸자 메드베데프가 크로스 리턴으로 뚫어낸 뒤 듀스에 이어 어드벤티지를 점했을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세트 역시 시소게임으로 흐르는 듯 했다. 그러나 경기 내내 열세였던 서브로 나달이 우위를 지켜내며 두 선수의 승부는 엎치락뒤치락 6번째 듀스까지 이어졌다. 결국 본인의 서브게임을 지켜낸 나달이 13분 38초만에 게임을 따냈고 승부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메드베데프가 러브게임으로 자신의 게임을 지켜냈지만 나달 역시 본인의 서브게임을 가져오며 5-3 상황. 이제 한 게임을 가져오면 우승이지만 나달은 노련하게 상대 서브게임에서 체력을 아끼며 5-4로 마지막 세트를 맞이했다. 나달은 서브에이스로 시작해 두 포인트를 먼저 따냈지만 우승에 대한 중압감에 더해 메드베데프의 날카로운 반격이 이어지자 더블 폴트를 범하며 추격을 허용했다. 멋진 스매시로 역전에 성공한 메드베데프가 브레이크에 성공, 게임스코어 5-5로 균형을 맞췄다.
그럼에도 기세는 나달에게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불필요한 드롭샷을 남발하며 잡았던 리드를 까먹는 동안 나달은 견고한 리턴으로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며 6-5로 12번째 게임에 돌입한다. 5세트 마지막 게임, 나달은 첫 포인트를 따내며 기선을 제압하더니 연달아 서브에이스를 기록하며 챔피언십 포인트를 맞이했다. 이어 가볍게 마지막 포인트를 따내며 러브게임으로 7-5 대역전극을 완성해냈다.
라켓을 집어던지고 환호한 나달은 곧바로 코트에 무릎을 꿇고 감격에 잠겼다. 역사적 경기를 직관한 현지 관중들 뿐 아니라 경기를 지켜본 테니스팬들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달은 이번 대회 우승상금으로 287만5000호주달러(약 24억3000만원)를 차지했다. 하지만 우승 상금보다 더 큰 부상은 개인 통산 21번째 메이저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조코비치와 페더러(이상 통산 20회 우승)를 넘어 역대 최다 우승자로 자리매김했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다가오는 5월 다음 그랜드슬램 롤랑가로스(프랑스오픈)는 ‘흙신’ 나달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다. 호주오픈 4연패 기회를 허망하게 놓친 조코비치는 나달이 그랜드슬램 우승을 22회로 늘리기 전에 코로나19 백신 미접종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재검토해야 할 것 같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