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밭일까지 고됐지만…제주여성 노동 지위는 낮았다

입력 2022-01-25 17:00 수정 2022-01-25 17:25
지난 2015년 9월 파이낸셜타임즈(The Financial Times)가 ‘제주해녀(The Sea Women of Jeju)’라는 제목으로 제주해녀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제주해녀는 세계의 이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며, 문화의 독특함을 전했다. 80대이상 고령 해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제주여성의 강인함과 독립성도 높이 평가했다. 제주도 제공

제주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는 물론 물질에 밭일까지 도맡으며 개항기 이후 높은 경제활동참여율을 보여왔음에도 사회적 지위는 그만큼 향상되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제주지역에선 여성의 노동 참여 자체가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은 1876년 개항부터 2000년까지 제주 사회와 여성 노동의 양상을 살핀 ‘근현대 제주여성노동사 정립을 위한 기초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번 연구는 경제 민속 사회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집필진이 참여한 다학제적 연구로 진행됐다.

연구원은 120년에 이르는 연구 시기를 ‘개항과 일제강점기(1876~1944년)’ ‘해방 이후 과도기(1945~1960년)’ ‘지역개발 시기(1961~2000년)’로 구분해 기존에 구축된 사료집 등의 자료를 분석하고 해녀, 농업인, 관광산업종사자, 공장노동자 등 10명을 면접 조사했다.

연구 결과 제주 여성들은 1960년대까지 밭일과 물질을 병행하며 제주경제를 이끌었지만 당시 여성 임금은 남성의 절반에 그쳤다.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이후에는 처우가 불안정한 서비스 직종으로 대거 편입되거나 감귤 농가의 보조적인 무급 가족 종사자로 되며 노동 지위가 하락했다.
제주, 전국의 성별 간 경제활동 참여율 비교. 통계청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와 4·3시기 제주 여성들은 밭일과 물질을 병행하고 국내외 다른 지역으로 원정 노동에 나서는 등 남성이 부재한 제주 경제를 살리는 데 주축이 됐다.

당시 제주 농업은 비료 사용이 적은 전작(田作) 중심인 데다 1930년대 중반 제주도민의 도일(渡日) 증가로 노동력이 감소하면서 농촌에서 여성 노동 투입 비율은 내륙 지역보다 높았다.

특히 한정된 면적에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면화, 고구마, 양잠 등 환금(換金) 작물 재배가 늘면서 여성들은 해산물 채취와 밭농사 두 가지 노동에 투입됐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 제주도 노무자들의 평균 임금을 보면 남자가 1일 평균 60.86원, 여자가 30.58원으로 여성 임금은 남성의 절반에 그쳤다.

이는 당시 제주 여성들이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전분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는 등 겸업 형식의 일을 주로 했던 결과로 풀이된다.

여성이 종사하는 업종에 비해 남성이 종사하는 업종의 임금이 최대 10배 가까이 많은 이유도 컸다.

1960년대 이후 제주에선 국가 주도로 목축업, 감귤 산업 등 1차 산업의 상업화가 시작됐다. 1980년대부터는 관광 개발이 본격화됐다.

이 시기 제주 여성들은 상당수가 처우가 불안정한 서비스업 직종으로 들어섰다.

노동 자율성을 상실한 채 남성 중심의 가구 내부로 귀속되거나 감귤밭 등 남성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무급 가족 종사자로 점차 주변화되어갔다.

여전히 노동은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제약되는 업종으로 편입된 것이다.

전국 여성들의 경제활동참여율도 1960년대 28.4%에서 2000년 48.8%로 두 배 가까이 확장될 때 제주지역 여성들의 경제활동참여율은 66.0%에서 60.8%로 오히려 감소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의 노동 참여 자체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직접적인 요인은 아님을 시사한다.

연구원은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의 지위는 경제활동참여율뿐만 아니라 일의 성격과 그 일이 사회적 지역적으로 갖는 맥락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연구원은 제주 안팎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강인한 제주 여성’이라는 표현이 제주 여성의 높은 지위를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게 함으로써 여성의 노동 가치를 하향 평가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주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여성의 노동에 대해 올바르게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연구를 진행한 강경숙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위원은 “‘강인한 여성’ 또는 ‘해녀’로 상징되는 제주 여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제주경제를 이끌어온 주체였지만 제주지역의 주류 역사로 주목받지 못했다”며 “막연히 제주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았다는 사실만으로 ‘제주 사회가 성평등하며 제주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고 추측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