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 폭로했다고 명예훼손?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입력 2022-01-24 06:47 수정 2022-01-24 10:09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사내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피해 사실을 알린 행위는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하급심은 비방 목적이 있었다며 유죄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동으로 판단된다며 무죄 취지로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훼손) 혐의를 받은 A씨의 상고심에서 원심의 벌금 30만원 선고를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4일 밝혔다.

A씨는 2016년 B씨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A씨는 소속 회사의 전국 각 매장 대표 이메일과 본사 직원의 회사 개인 이메일로 ‘저는 B씨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내용을 보냈다. 그는 이메일에서 2014년 10월 직원 여러 명이 참석한 술자리에서 팀장 B씨가 자신을 성추행하고 성희롱 문자를 보냈다는 등의 내용을 언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사원들을 모아 마련한 자리에서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으며 성추행이 이뤄졌고, 문자로 추가 희롱이 있었다’ ‘절차상 성희롱 고충상담 및 처리 담당자가 제게 성희롱을 했던 B씨이므로 불이익이 갈까 싶어 말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부남인 B씨는 그날 늦은 밤 3시간에 걸쳐 A씨에게 12통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오늘 같이 가요’ ‘맥줏집 가면 옆에 앉아요. 싫음 반대편’ ‘왜 전화 안 하니’ ‘남친이랑 있어. 답 못 넣은거니’ 등 내용의 연락을 했다. A씨는 이에 답하지 않았다.

A씨는 노동당국에 대표이사를 상대로 진정도 제기했으나 사건은 혐의없음(증거불충분)으로 행정종결 처리됐다. 수사기관은 이후 A씨는 B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1심은 “(A씨가 문제 삼은) 행위는 당시 유부남인 B씨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더라도 관심을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면서 “성추행,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해도 A씨가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데도 메일을 보냈다”며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2심 판단도 같았다.

1·2심은 A씨가 비방을 목적으로 이메일을 보낸 것이라고 봤다. A씨가 본사에서 일하다가 지역 매장으로 인사 발령을 받게 되자 갑자기 B씨의 1년여 전 행동을 폭로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이메일은 A씨의 직장 내 성희롱 피해 사례에 관한 것으로 회사 조직과 구성원들의 공적인 관심 사안”이라며 “B씨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범죄의 증명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문화와 인식, 구조 등에 비춰볼 때 A씨로서는 ‘2차 피해’의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며 “신고하지 않다가 퇴사를 계기로 이메일을 보냈다는 사정으로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추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