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운 恨 이제 풀고 가오”…87세에 받은 졸업장

입력 2022-01-21 00:04 수정 2022-01-21 00:04
국민일보DB

평생 배움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늦깎이 만학도들의 특별한 졸업식이 열린다. 코로나19 확산세 탓에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졸업식이지만 예비 졸업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인천시 미추홀구 남인천중·고등학교는 오는 27일 오전 중학교 224명과 고교 237명 등 학생 461명의 비대면 졸업식을 연다고 22일 밝혔다. 졸업생 연령대는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평균 연령은 중학교 졸업생이 64세, 고교 졸업생이 62세다.

주변에 털어놓기 어려웠던 서러움을 떨쳐내고 당당하게 학업을 끝마친 예비 졸업생들은 제각각 모두 아름다운 도전기를 써냈다. 이들은 다가올 졸업식이 배움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일한 가족인 외동딸이 떠나고…”

최고령 졸업생 임재석(87)씨. 남인천중고등학교 제공

최고령자인 임재석(87)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큰형님’으로 통한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모두 겪은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임씨는 12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고, 어렸을 적 인천에 올라와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그는 생계를 이어가느라 학교 문턱을 밟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 유일한 가족은 외동딸뿐이다. 결혼 후 세 아이의 아빠가 됐으나 두 아들은 5살과 7살이 되던 해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아내까지 백혈병으로 숨지는 비극을 겪으며 딸과 단둘이 살아왔다.

임씨는 의지해온 딸이 독립하자 자신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 주안 문해학교에 다니며 초등 과정을 마쳤고, 주안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남인천중학교 교사의 소개로 중학교에도 입학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과 주변의 편견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의 도전정신만 있다면 나 같은 80대도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로 만학도들을 격려했다.

형수와 시동생 사이로 학교 졸업하는 황규순(70·여)씨와 최기덕(71)씨. 남인천중고등학교 제공

나란히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의 꿈을 이룬 최기덕(71)씨와 황규순(70·여)씨는 시동생과 형수 사이다.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강했던 황씨는 어릴 적 공장 일과 야학을 병행하며 학업을 이어왔지만, 스물 넷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시동생인 최씨가 동사무소에서 가져온 학교 홍보물을 보고 학교에 함께 입학한 두 사람은 2년간 같이 공부하며 학업을 마쳤다. 최씨는 고교 진학을, 황씨는 사회복지 관련 전공의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밖에도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쫓기듯 미국으로 떠나 50년 가까이 살다가 뒤늦게 고국에 돌아와 졸업장을 받게 된 70대 여성,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을 다니면서 중학교를 졸업한 다문화가정 주부도 있다.

“마음의 성장 이루는 평생학습의 장”

남인천중·고등학교는 1984년 7월 학생 7명으로 출발했다. 지금은 재학생 1300명, 교직원 60명 규모까지 커졌다. 근로 청소년과 배움을 갈망하는 어려운 사람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자는 설립 취지에 맞게 저소득층 자녀와 만학도들이 입학 대상이다.

처음에는 청소년과 성인반으로 구성했으나 2020년부터 성인반만 운영하고 있다. 모두 별도의 검정고시를 볼 필요 없는 정규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일반 학교와 똑같이 학력이 인정된다. 고교 과정을 마치면 교육활성화 업무협약을 맺은 인천대평생교육원에서 대학 정규과정도 밟을 수 있다.

주·야간으로 구성돼 방학 없이 1년에 3학기제를 들을 수 있다. 일반 학교처럼 2학기가 아닌 3학기로 운영하는 이유는 교육과정을 2년 만에 끝내기 위함이다. 학업으로 초래될 수 있는 생업과 가사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배려다.

개교 38년째를 맞은 올해까지 졸업생 1만6104명을 배출했다. 그 중 성인이 6888명(42.77%)을 차지한다.

특히 전 학년에서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보다 높다고 한다. 학교 관계자는 20일 “모두가 가난했고 살기 어려웠던 그때는 딸까지 학교에 보낼 정도로 넉넉한 집이 많지 않았다”며 “집안 살림이나 농사를 하며 오빠나 남동생을 뒷바라지하셨던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38년 전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한 윤국진 교장(75)은 이곳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성인들에게 배움의 한을 풀고 마음의 성장을 이루도록 하는 평생학습의 장”이라고 소개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