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낸 6월 항쟁의 도화선인 당시 연세대생 고 이한열(1966년생)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가 9일 오전 5시 28분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9일 광주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배 여사는 지난 3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은 뒤 8일 퇴원했다. 주변인과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등 한때 건강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으나 하루 만에 다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집에 있던 가족이 의식불명의 배 여사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은 다른 지역에 사는 가족이 고인이 안치된 조선대 병원에 도착하면 장례 절차 등을 결정할 예정이다.
평범한 주부이던 배 여사는 아들 이한열 열사가 1987년 6월 연세대 앞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아들의 뒤를 이어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91년 대학생 분신 정국을 시작으로 2009년 용산참사 때 한걸음에 달려가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어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집회 등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참여해서는 각종 민주화 시위·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는 유가협 회장을 맡은 배 여사는 422일간 국회 앞 천막 농성을 벌이는 등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직접 이끌어냈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의 상처를 보듬고 30여년간 민주 투사와 다름없는 삶을 꾸렸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유가협 가족들과 20년째 공전 중인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앞 농성에 참여해왔다. 지난달 말까지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왔다.
이 때문에 배 여사는 1987년 1월 경찰 고문으로 숨진 후 6월 항쟁의 불씨가 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씨에 견주어 ‘유월의 어머니’로 재야에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생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에 매진해온 배 여사는 아들인 이한열 열사가 민주유공자 지정을 받는 것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광주지역 시민사회는 배 여사의 별세 소식에 애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배 여사는 민주화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6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장남수(79) 유가협 회장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이한열 열사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며 35년간 민주주의 발전에 온몸을 던진 투사였다”고 회고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