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을 하지 않는 건 위험을 감수하기로 선택한 것으로, 이를 허용해야 한다. 백신 명령은 국민에게 원치 않는 잠재적 위험을 감수하도록 강요한다.” (사무엘 알리토 대법관)
“매일 약 100만 명 정도의 신규 확진자가 보고되고 있는데, (백신 의무) 규칙을 막는 게 공익을 위한 것이라니 믿기지 않는다.”(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
지난 7일(현지시간) 미 연방 대법원에서 열린 조 바이든 행정부의 민간기업 ‘백신 접종 의무화’ 조치 효력 정지 공개변론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역 패스’ 논쟁과 판박이였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정부가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 규제의 실효성을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찬반양론은 그러나 대법관의 진보·보수 이념 성향 따라 명확히 갈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심화한 보혁 갈등이 공중보건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암초 걸린 바이든 방역정책
미 직업안전보건청(OSHA)은 지난해 11월 100인 이상 민간 사업장에 대한 근로자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고 미접종자들은 검사를 받도록 강제했다. 요양원과 병원 등 의료시설도 같은 규제를 받는다.
한국이나 유럽처럼 시설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방역패스 대신, 작업장 노동자에 대해 백신을 의무화하는 조치다. 한국이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법’에 따라 시설 관리자와 운영자, 이용자를 모두 규제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방역패스보다 규제 범위가 훨씬 좁다.
OSHA는 1970년 직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창설됐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작업장에서의 안전 및 위생 기준을 연방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 실행한다.
정부 측 엘리자베스 프렐로거 법무부 송무 담당 차관은 “코로나19는 OSHA 역사상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며 “심각한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행정부에 이양된 권한을 의회가 갱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조치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정당한 권한 행사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조치로 첫 6개월 동안 6500명의 생명을 구하고 25만 명의 입원을 예방할 것으로 추정했다.
진보 성향의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방역 규제 영역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있고 정치적 책임이 있는 행정부가 결정할 문제이지, 비선출직 판사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유권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통령에 대해 투표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거의 백만 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매일 죽어가고 있다”며 “이것이 모든 것을 막는 데 가장 적합한 정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주 정부나 민간 영역의 권한을 과도하게 침해한 것으로 봤다.
닐 고서치 대법관은 “국민의 직접적 대표자인 주 정부와 의회가 백신 접종을 강요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존 로버트 대법원장은 52년 전 만든 법으로 행정기관 권한을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라는 취지로 비판했다.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코로나19는 2년 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도대체 ‘긴급’이 언제 끝나는 거냐”며 “바이든 행정부의 요구 사항은 특정 산업이나 직업 유형에 더 좁게 맞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노동자가 감염 위험이 적은 실외에서 일하는 조경업체 등 사업장까지 일괄 규제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알리토 대법관은 “나는 백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작용) 위험이 있지 않으냐. OSHA가 위험성 있는 안전 규정을 부과한 사례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OSHA 규정은 노동자의 근로시간에만 적용되지만, 백신 접종은 영구적이라고 점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코끼리를 쥐구멍에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바 있는 브렛 캐버노 대법관도 “장기 요양 시설에 감염 통제 프로그램을 갖추도록 하는 법적 요구는 정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유형의 시설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처럼 경제적 영향도 논쟁의 대상이었다. 전미자영업연맹(NFIB) 측 스콧 켈러 변호사는 백신 미접종자들의 퇴직으로 기업들이 인력난에 직면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이미 민간 기업은 노동자 보호를 위해 역사적 수준의 행동을 해 왔다. 백신 의무화는 회복 불가능한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전가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바이러스는 이미 핵심 산업 근로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오랫동안 직장에 나오지 못한다. 그런데도 백신에 대한 의무는 없다”고 지적했다. 백신 의무화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19 때문에 노동력이 약화한다는 것이다.
회의적 전망
미 언론은 대체로 바이든 행정부의 백신 조치가 대법원에서 무력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했다. 9명의 대법관 중 6명이 보수 성향이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 대법관 중 3명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명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법원) 재판관 재편으로 만든 트럼프의 유산이 연방 관료제를 무력화하고, 규제 당국을 공허하게 만들 가능성을 강조한다”며 “법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 논쟁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로이터통신은 “수많은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백신 접종 문제가 얼마나 분열적인지를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케이트 쇼 카르도조 로스쿨 법학교수도 ABC 방송과 인터뷰에서 “새로 구성된 연방 대법원은 연방 권력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했다.
한편,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에서 8일(현지시간) 최근 7일간 하루 평균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64만8211명으로 2주 전보다 3.28배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하루 평균 입원 환자는 2주 전보다 72% 늘어난 12만1599명에 달했다. 사망자도 같은 기간 11%가 증가해 1499명이 됐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의료진까지 증가하면서 의료 압박을 받는 병원도 크게 늘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