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숙원’인 재정준칙 도입이 현 정권에서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도입 필요성과는 별개로, 내용이 적절한지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다음 정권에서 내실 있는 ‘한국형 재정준칙’ 추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질 전망이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재정준칙 도입 계획을 밝힌 뒤, 같은 해 12월 재정준칙 도입을 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1년 넘는 시간 동안 국회에서 해당 법안이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다. 그 사이에 ‘국가채무 1000조원 시대’가 도래했다. 올해 본예산 기준 국가채무는 1064조4000억원이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처음 50.0%에 도달한다. 현재 36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 터키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다.
8일 정부에 따르면, 홍 부총리는 여전히 재정준칙 도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정부가 ‘한국형 재정준칙’을 만들 때도, 홍 부총리가 한도 계산식 등에 관여했을 만큼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해당 법안을 심사해야 할 국회는 전혀 다른 생각 중이다. 특히 대선이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오고, 여야 대선 후보의 ‘돈풀기 공약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재정준칙 논의는 더더욱 멀어져가는 모양새다. 여권의 연초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압박도 커지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선거를 앞두고 돈을 거둬들인다거나, 돈을 덜 쓰겠다고 하는 것은 표를 떨어뜨리기 위해 작정하고 하는 얘기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다만 재정준칙 도입 필요성 여부와 별개로, 정부가 제시한 ‘한국형 재정준칙’ 내용이 적절한지를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당시 한국형 재정준칙이 공개됐을 때 여야 정치권,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각기 다른 이유로 강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재정 전문가들도 재정준칙 도입 자체는 긍정하더라도 정부가 제시한 안이 허술하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일단 정부가 자체 개발한 ‘한도 계산식’의 적절성 여부, 예외조항 등 분명한 원칙·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점, 위기 후 복원 규정이 미미하다는 점 등이 주로 꼽힌다. 이정희 서울시립대 행정학 교수는 ‘재정준칙 해외사례 비교 및 국내 도입 방안 보고서’에서 독일·스웨덴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정부 재정준칙이 재정적자 허용 폭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총지출 제한, 국가채무비율 제한 등 재정준칙을 결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제언했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지난달 발간한 ‘예산정책연구’에도 경제위기 대응 재정준칙에 대한 연구 내용이 실렸다. 보고서는 정부 재정준칙안이 경제위기 대응 재정준칙의 외형적 틀은 일부 갖추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주요 요건을 대부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전수경 국회 정책연구위원은 “곱셈 산식 등으로 ‘경우의 수’를 복잡하게 만들어 정책 집행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저해할 위험성이 지적된다”며 “준칙의 주요 내용을 대통령령에서 정하도록 하고 법률에는 위임 근거만 뒀다는 점에서도 엄격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