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고취된 폭도들이 의회를 공격한 건 미국 정치에 불길한 선례가 됐다. 국가 분열을 심화했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킬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
“미국의 가장 긴급한 위협은 이제 내부에서 온다. 민주주의 자체의 미래를 겨냥하고 있다. 더 심각한 건 위협이 주류 계층에게서 왔다는 것이다.” (신시아 밀러-아이드리스 아메리칸대 교수)
지난해 1월 6일 의사당 난동 사건 1년을 맞으면서 미국의 위기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우려는 대체로 ‘내란 수준’의 갈등으로 불릴 만큼 국론이 분열됐고, 주류 사회마저 당파적 극단주의를 향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집약된다.
극단 세력의 위협
미 연방의회 경찰서장 토마스 맨거는 5일(현지시간) 상원 청문회에서 “지난해 연방 의원에 대한 위협이 9600건 접수됐다”고 말했다. 하루 26건꼴이다. 2017년에는 4000건 정도였는데, 이후 지속 증가하다가 지난해에는 그 두 배를 넘어섰다고 한다.
맨거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위협이 온다. 지난주 워싱턴포스트(WP) 기자와 인터뷰 하는 도중에도 한 상원의원을 죽이겠다는 위협이 있었다”며 “우리는 매일 이런 종류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메릭 갈런드 미 법무부 장관도 이날 1·6일 의회 폭동 1주년 연설에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민주주의 작동을 도운 사람들이 위협과 폭력의 표적이 돼 온 것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며 “선출된 공직자와 교사, 기자, 교사, 공무원, 판사, 경찰관들이 살해나 참수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는다”고 말했다. 갈런드 장관은 “폭력 행위와 위협이 국민 생활에 스며들어 일상화될 위험이 있다”며 “안전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에도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미국 극단주의 연구자 신시아 밀러-아이드리스 교수는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오늘날 미국인의 안전과 안보에 가장 시급한 위협은 외국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국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이 같은 위협이 사회의 주류 세력에게서 왔다는 점이 치명적이라고 분석했다. 밀러-아이드리스 교수는 “1월 6일 공격자 중 대다수가 평균 연령 40대의 직장인이었다. 교사, CEO, 재향 군인, 의사, 변호사도 포함됐다”고 했다. 비주류의 외로운 늑대(lone wolf·론 울프) 형 테러와는 성격이 달랐다는 것이다.
아이드리스 교수는 또 “미국인은 점점 더 정치적 폭력을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무리가 아닐 정도”라고 언급했다.
우려는 여론조사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악시오스는 “미국인 57%가 ‘1·6일 폭동’ 같은 일이 수년 내 다시 발생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의 여론조사 결과를 이날 보도했다. 응답자 23%는 폭동 재발 가능성을 ‘매우’ 높게 봤다고 한다.
악시오스는 또 “미국인 37%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고 답했고, 10%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적이 없다’고 답했다”며 “응답자 63%는 의회 폭동이 이런 가치관 변화에 영향을 줬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사회가 의회 폭동 사건의 파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악시오소는 “미국인 절반 이상은 분열이 이전보다 악화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며 “광범위한 분열에서 단 한 가지 일치한 건 ‘미국이 그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
미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양극화에 따른 민주주의 쇠퇴를 원인으로 꼽았다.후쿠야마 교수는 기고문에서 “세계화와 경제 변화로 많은 사람이 뒤처졌다. 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 전문가와 전통적 가치를 지닌 작은 마을 거주자 사이에 커다란 문화적 격차가 나타났다”고 했다. 또 “정치는 점점 양극화되고, 교착상태에 빠져 예산 통과 같은 기본적 정부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1·6 폭동은 미국인 상당수가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로벌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음을 나타낸다”고 했다. 극단주의와 비민주주의, 권위주의, 독재가 세계 곳곳에서 다시 범람하고 있는데, 미국 스스로가 민주주의 위기를 겪으며 신뢰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좋은 민주주의 모델을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신뢰성은 갈가리 찢겼다. 중국, 러시아와 같은 적들이 이 상황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WP도 칼럼을 통해 “1·6일 폭동의 유산은 분열되고, 합의가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약해진 미국에 대한 서사일 수 있다”며 “폭동 1년 후 세계는 여전히 미국 민주주의에서 무언가 망가진 것을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겨냥한 바이든
조 바이든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미 의회 폭동 1주년 기념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격하며 그의 책임론을 꺼내 들었다. “국가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우선시해 거짓을 퍼뜨렸다” “미국 민주주의의 목에 단검을 꽂았다” 등의 날 선 표현을 사용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폭력적인 폭도들이 의사당을 탈취하는 동안 대통령이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또 “전직 미국 대통령이 2020년 대선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렸다. 미국보다 자신의 이익을, 원칙보다 권력을, 민주주의나 헌법보다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경찰이 폭행당하고 생명의 위험에 처해있는 동안, 군중을 부추긴 전직 대통령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러면서 “정치적 폭력을 표준으로 삼는 나라, 당파적 선거 당국자들이 국민의 법적 의사를 뒤집는 나라, 진실의 빛이 아닌 거짓의 그늘에 살아가는 나라가 될 것이냐”며 “우리는 그런 나라가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며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고 비난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은 1·6 의회 폭동을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4년이 미국에서 일으킨 일의 비극적 정점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갈런드 장관은 “폭동의 모든 가해자에게 법에 따른 책임을 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날 폭동에 참석했든 아니든 상관없다”며 “지금까지 취한 행동이 끝이 아니다”고 말했다.
외신은 민주당 등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참모를 기소하라는 압박이 나오는 와중에 이 같은 연설을 한 점을 주목했다.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수천 명 시위대가 의사당으로 향하기 전 “죽기로 싸우라”고 부추기는 연설을 해 선동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른 상태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