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교수 “한국 근현대사 진영논리 벗어나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입력 2022-01-03 16:11 수정 2022-01-03 16:22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강남구 한국역사연구원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이태진(79)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역사 바로잡기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을 목표로 제자 교수들과 함께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전체 8권의 시리즈 가운데 1권과 8권을 이 교수가 직접 집필한다.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학’의 힘에 주목한다. 일본 제국주의 확장의 밑바탕에도 왜곡된 역사학이 깔려있다고 본다. 19세기 말부터 주변국 침략의 정당성을 담아 만든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일본인들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침략의 일원이 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본이 아직도 과거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으면 동아시아 미래는 어둡다”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 역사학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양심적인 역사 인식은 소수 의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는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 질서의 확립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현 정부의 한일 관계에 대한 평가와 전망 문제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도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사실을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후변화와 같은 미래 이슈에 대한 대답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역사적 기록에서 힌트를 찾았다. 인터뷰는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한국역사연구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현 정부의 대일외교를 평가하자면.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그 수준이 시대와 걸맞지 않다. ‘토착 왜구’ ‘친일 색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단어들은 광복 직후에서 1960년대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돌았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흐름 속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민중 사학’이 유행하면서 이런 구호가 재부상했다. 그 영향이 오늘에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제국주의 구호는 이제 낯설 정도로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대방으로부터 비웃음을 살 뿐이다. ‘철 지난 구호’는 접어야 할 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 역사학계가 더 분발해야 한다. 일본 역사학계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 일본 학계가 주변국 침략을 정당화한 제국시대 역사학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의 역사를 교과서를 통해 국민에게 가르쳐야 한다. 대다수 국민의 머리에 제국시대 영광이 박혀 있는데 양국 정상이 만나서 성명서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번 연구를 통해 일본 역사학계 주류가 이 시대적 과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학계도 진영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려 드는 우를 범하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국가나 정부는 학술 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국가 연구 기관의 책임자가 덩달아 바뀌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현 정부 출범 후 5년이 지났다.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촛불혁명’에 많은 기대를 실었지만, 실제 흘러가는 것을 보니깐 아니더라. 당시만 해도 중도 세력의 외연이 많이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촛불 민심을 두루 대표하지 못하고 특정 세력만의 정권이 됐다. 중도의 새로운 가능성도 죽어 버렸다. 문재인정부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동산 정책을 비롯한 주요 경제 정책은 약자를 돕는다는 선의를 표방했다. 세계사적으로 ‘선의’의 깃발로 내건 메시아적 이데올로기의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1세기 들어와 날로 다변화하고 있는 사회경제 문제를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메시아니즘으로 접근하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밟지 말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고나 할까.”

-대선이 두 달 남짓 남았다.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벌써 후보들이 다 말하고 있지 않나(웃음). 우리나라 정당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다 참 기이한 걸 발견했다. 이데올로기가 한눈에 보이게 적혀 있지 않았다. 여야정당의 강령을 자세히 보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중복되는 게 상당히 많다. 누가 그걸 한참 들여다보면서 읽고 있겠나. 미국 정당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각기의 ‘이데올로기’를 구체적으로 직접 밝히고 있다. 우리 주요 정당 홈페이지에는 그런 항목이 눈에 띠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정당들이 너무 변신을 거듭한 결과일까. 진보, 보수를 내세우면서 정작 홈페이지에는 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전통과 정체성의 결핍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경쟁해야 한다.”

-새해에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포용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 아닌가 싶다. 국가 운영 시스템을 폭넓고 세밀하게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여러 측면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한다. ‘민주화’나 촛불 혁명을 일부 진영이 독점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유당 독재에 대해서 온 국민이 모두 나서다시피 했다. 80년대 민주화도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중심 역할을 했지만, 이를 지지하는 수많은 넥타이부대가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성공했다. 촛불도 마찬가지다. 넓은 사회계층이 참여했다. 특정 정치 세력이 과실을 독점하면 실패하고 만다. 한국의 근현대사도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 나라의 장래가 보장된다.”

-사회적으로 ‘공정’이 화두다. 주요 대선후보들도 모두 ‘공정’을 주요 키워드로 언급한다.
“한국 사람의 DNA에는 강한 비판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불의를 보면 가만히 참지 못한다. 조선 시대를 봐도 언관 기관이 셋이나 되는데 세계사상 유례가 없다. 왕한테 올리는 상소가 이렇게 많은 왕조를 찾기도 힘들다. 그만큼 자기 의견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붕당정치와도 무관치 않다. 조선 시대 성리학에서 말하는 공도(公道)는 곧 영어의 Justice(정의)와 같은 말이다. 공도를 실현하기 위해 각자 학파에 따라 여러 논리를 펼쳐 말이 많았다. 이게 ‘한국의 힘’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는 역량’이 곧 역사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후변화 문제가 주요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 500년 중 가운데의 270년은 자연재해 연속의 시대였다. 1490~1760년은 이른바 ‘소빙기’로서 기온이 떨어지는 자연 재난이 계속됐다. 지금의 지구 온난화와는 반대였지만 재난은 마찬가지였다. 이 연속적인 재난의 실상은 ‘조선왕조실록’에 다 담겨 있다. 태양계 내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떠돈 수억 개의 돌덩이로 이뤄진 ‘소행성 벨트’가 지구 중력에 의해 집중적으로 몰려 들어올 때가 있었다. 40 여일 동안 서울 일대가 유성 떼에 실려 온 우주 먼지(cosmic dust)에 휩싸여 사방 천지가 깜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이상 현상이 장기화하면서 농사를 망쳐 기근이 끊이질 않았고 전염병도 창궐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을 정치를 잘못한 인재 탓으로 돌렸지만 천재지변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이 시기 많은 왕조가 망했다. 그나마 조선 왕조는 빈민을 구제하는 경제 대책을 세워서 망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도 의미가 있겠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천재지변이 일어나 기근이 들자 나라에서 열심히 진휼 정책을 썼다. 쌀이 모자르자 명예직급을 내주는 납속공명첩을 발급해 여유 곡식을 거둬들였다. 나라가 굶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려는 안간힘이었다. 대동법과 균역법을 시행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기근 구제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곡식과 면포를 토지세로 거두었다. 이런 지혜의 동원으로 조선 왕조는 17세기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코로나 대응도 마찬가지다. 온난화와 미세 먼지 현상이 동시적으로 계속되면 호흡기 질환이 장기적으로 반복될 소지가 많다. 한두 해가 아니라 5년, 10년, 20년 단위의 플랜을 짜서 대응해 나가야 할 문제로 본다. 장기적인 과학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지혜다.”


이태진 교수는?
1977년 모교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32년 동안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으며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 과정을 밝혀내 환수 운동을 벌였다. 대한제국 시기 여러 문건들에서 황제의 서명이 위조된 것을 발견해 일제 강점의 불법성도 지적했다.
미국 하버드대, 일본 도쿄대에서도 한국사를 강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사학회 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새 한국사’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고종시대의 재조명’ 등이 있다.

김판 신용일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