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전략 탓인가, 공판중심 영향인가… 더디게 가는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입력 2022-01-02 18:23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월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이 또 다시 해를 넘겼다. 현 정부 초기 불거진 사건이지만, 현재의 진행 상태라면 이들의 1심 선고는 다음 정권에서야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가 인사이동으로 교체되고, 이후 앞선 재판에서 불렀던 증인들의 녹취파일을 다시 틀거나 증거조사 방법 등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사이 재판 시계가 느리게 돌아갔다. 고위 법관이었던 피고인들만 가능한 지연 전략이란 비판과 공판중심주의의 역설이란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엄상필)는 임 전 차장이 자신의 재판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를 상대로 낸 재판부 기피신청의 기각결정을 파기환송했다. 기피신청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본 재판도 멈춰서게 된 것이다. 오는 7일 재개되는 양 전 대법원장 재판도 아직 증인신문 절차가 끝나지 않아 3월 대선 전에 결론이 나긴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들 재판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데는 피고인들의 ‘정석 재판’ 주장이 한몫 했다. ‘재판 베테랑’인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박병대 전 대법관의 사건은 지난해 초 재판부 구성원이 모두 바뀌고 공판 갱신 절차를 밟는 데만 7개월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전 재판부에서 불렀던 주요 증인의 녹취파일을 법정에서 일일이 재생한 때문이다. 피고인 측은 “조서가 예단을 불러올 수 있는데, 이를 탄핵 할 수 있을 만한 의미 있는 부분이 기존 증언 중 많았다”고 주장했다. 통상 피고인들이 앞선 절차를 간략하게 요약하는 방식의 공판 갱신에 동의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4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 측이 서증조사 방식에 반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 전 차장 측은 지난 6월 몇 기일에 걸쳐 “검찰이 증거서류의 요지만 고지하는 것은 형사소송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폈다. 공판중심주의 실현을 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증거서류를 모두 낭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임 전 차장이 직접 “심리의 효율성에만 방점을 두고 과거의 형사소송법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건 위법의 소지가 분명하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무죄가 확정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사건에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이 문제시됐던 것도 공판중심주의 영향이다. 1심 재판부는 유 전 연구관이 조서를 읽고 이의제기 없이 서명한 점, 변호인이 참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것만으론 유 전 연구관 진술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아예 없다고 볼 순 없다고 판단했다.

형사소송 교과서처럼 진행되는 사법농단 재판을 바라보는 법조계의 시선은 복잡하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전 대법원장 등 최고의 법률가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다른 피고인들이 이런 재판을 받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 지연 전략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원칙에 기반해 절차에 맞게 재판이 진행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며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