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지명관 전 교수 별세… 경계인으로 산 지식인

입력 2022-01-02 12:37 수정 2022-01-02 12:49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국민일보 자료사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저자이자 한일간 화해와 협력을 강조했던 지식인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지난 1일 별세했다. 향년 98년.

고인은 북한, 남한, 일본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공간을 거쳐오며 ‘경계인’의 눈으로 역사와 미래를 바라본 지식인이었다.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김일성대학 1회 입학생이었다가 1947년 월남했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덕성여대 교수를 거쳐 월간지 ‘사상계’ 주간으로 활동했으며, 박정희 정권을 피해 1973년 도일했다.

고인은 일본에서 도쿄여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지원했고, 일본 피랍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다. 특히 일본의 진보 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TK생(TK生)’이라는 필명으로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15년간 연재하며 해외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알리는 통로 역할을 했다. 당시 국내 정보기관의 추적에도 ‘TK생’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2003년 ‘세카이’를 통해 고인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20년이 넘는 일본 생활 끝에 고인이 귀국한 것은 1993년, 그의 나이 68세가 돼서다. 귀국 이듬해부터 한림대 석좌교수이자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아 10년간 근무했다. 고인은 “내가 처음 연구소를 맡았을 당시 국내에는 일본학 연구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면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는 국내 일본학 연구소 1호이자,한국에서 일본학 연구의 시민권을 준 연구소”라고 평가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에서 취임사준비위원회 위원장과 KBS 이사장을 역임했다.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 국민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사상가, 역사가, 저술가이자 일본 전문가였다. 평생 반독재와 남북평화, 한일화해를 주장해 왔다. 박정희 정권의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그 나름대로 위대했다고 평가했으며 “어느 시대나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게 마련이고, 그걸 넘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역사를 그렇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랜 일본 생활을 통해 다져진 인맥과 학문은 그를 최고의 일본전문가로 만들었으며,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높은 대접을 받았다. 대표적인 지일파 인사로 한국과 일본이 ‘화해와 협력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평생 고수했다. 고인은 2004년 인터뷰에서 “중국이 부상하면서 관심이 그 쪽으로만 쏠려있는데 한·일관계의 중요성은 여전하다”며 “특히 대북관계와 관련해 일본의 존재가 대단히 중요하다. 대국들 사이에 끼인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전처럼 피해의식만 가져서는 안되고 일본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저고리와 요로이’ ‘한국 현대사와 교회사’ ‘한국과 한국인’ ‘한일 관계사’ 등 10여 권의 책을 썼고, 그의 저서 대부분은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80세에 쓴 회고록 ‘경계를 넘는 여행자’는 국민일보와 일본 ‘세카이’에 동시 연재됐고, 양국에서 책으로 출판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정숙씨와 자녀 형인(게이오대 교수), 효인(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임원), 영인(미네소타대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이천 에덴공원묘(02-2072-2020).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