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대부분을 ‘다른 개에게 피를 주기 위해’ 살아가는 공혈견. 공혈견·공혈묘를 활용하는 민간업체 H사가 국내 동물 혈액 수급의 대부분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공혈동물의 처우 문제는 수차례 제기됐다.
이들의 운명을 바꿔줘야 한다는 데에는 다들 동의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개선할지를 두고는 의견이 나뉜다. 현실적으로 당장 공혈동물을 없앨 순 없으니 법제화해서 보호하자는 주장이 있다. 한쪽에선 동물 헌혈 문화를 안착시켜 공혈동물이 더는 매혈하지 않도록 하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법제화 통해 공혈동물 복지 두텁게
수의사들은 딜레마 상황에 놓여있다. 동물 헌혈 문화가 공혈동물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광주 동물메디컬센터 송정은 원장은 1일 “지금 당장 공혈견에게서 뽑은 혈액을 공급받지 못하면 아픈 동물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사람 혈액을 적십자사가 전담 관리하는 것처럼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물 혈액 공급 사업이 개인이나 민간 차원에서 진행될 경우 결국 이윤을 추구하게 되므로 공혈견의 사육환경이나 처우 개선에 신경 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정치권에서도 공혈동물 관련 제도를 법제화해서 이들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7년과 2019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한정애, 김영호 의원이 각각 동물 관련 영업에 ‘동물혈액공급·판매업’을 신설하도록 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다.
당시 김 의원은 “공혈동물의 사육과 관리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없어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사육하거나 혈액을 채취해도 마땅한 단속 규정이 없었다”며 “적절한 법의 보호와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 공혈동물의 적절한 동물권 보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법안 발의만 겨우 이뤄졌을 뿐, 국회에서 심사과정이 뒤따르지 못하며 법제화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동물권 행동단체 카라의 김현지 실장은 “공혈동물 대신 헌혈로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지금 헌혈만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그래서 과도기적인 조치가 필요하고 적어도 그 과도기에는 공혈동물 시설 기준이라든지 혈액 뽑히는 동물들의 보호와 복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입법을 통해 서둘러 대책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공혈동물 인정 안 돼…헌혈문화 정착 필요
공혈동물 법제화는 결국 ‘공혈동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공혈동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야 하며 헌혈문화를 통해 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헌혈견협회는 동물 헌혈 문화 정착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단체다. 2017년 출범한 이 단체는 정기적으로 헌혈 지원견을 모집해 이들로부터 얻은 혈액을 14개의 협력 동물병원에 공급하고 있다. 또 수혈이 필요한 개와 혈액형이 맞는 헌혈 가능견을 연결해주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헌혈견협회 강부성 대표는 “공혈견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역할’과 ‘의무’가 있는 공혈견은 사랑을 받고 자라는 반려견과는 다르다”며 공혈견을 법제화하기보다는 헌혈문화로 이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헌혈이 반려견의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헌혈은 강아지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선택”이라고 장점을 설명했다.
대다수 수의사 역시 헌혈을 하면 골수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혈액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헌혈이 개들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헌혈하면 기본적인 건강검진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반려견이 헌혈하기 위해선 2~8세 사이의 25㎏이상 큰 개여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심장사상충, 진드기 매개 질병, 바베시아, 혈액·바이러스 관련 질병 내역도 없어야 한다. 한국헌혈견협회는 헌혈견을 대상으로 바베시아 등을 포함한 진드기 매개 질환 4종과 심장사상충 감염을 확인할 수 있는 항체 키트를 제공하고 있다.
통상 대형견 1마리의 헌혈로 반려견 4마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건강을 선물해줄 수 있다. 그래서 한국헌혈견협회는 반려견 헌혈 문화의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지만, 아직 참여율이 저조한 실정이다.
한국헌혈견협회는 5000마리 정도의 헌혈 참여견이 활동하는 커뮤니티 형성을 목표로 한다. 강 대표는 “2015년 보도에 따르면 국내 동물 혈액 수급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H사에 있는 강아지 수는 200~300마리”라며 “이 강아지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헌혈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형견 3600마리가 매년 한 번씩 헌혈을 진행하면 공혈견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3600마리의 강아지가 매년 한 번씩 헌혈하는 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려면 헌혈견이 5000마리까진 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표 헌혈견 수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강 대표는 “한국헌혈견협회 홈페이지의 회원 수는 약 2000명이지만 실질적으로 헌혈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정회원의 수는 448명”이라며 “현재 정기헌혈과 긴급헌혈을 모두 합쳐 매달 20~30여마리의 개가 헌혈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미진 인턴기자
천현정 인턴기자
한제경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