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주기 위해 살아가는, 나는 공혈견입니다

입력 2021-12-31 17:42
반려인구 1500만 시대가 도래했다. 가족처럼 사랑받는 반려동물이 있는 반면, 소모품과 같은 삶을 살다가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우리 집 반려견이 수술받는 데 필요한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개는 매혈(賣血)의 운명에 놓여 있는 것. 위태롭고 슬픈 운명에 처해있는 공혈견의 실태와 동물 헌혈문화 정착을 위한 제도적 대안 등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왼쪽은 지난 2015년 동물단체 케어가 폭로한 공혈견 사육장 모습. 오른쪽은 헌혈 중인 리트리버의 모습. 동물단체 케어, 한국헌혈견협회 제공

“긴급/1.2 혈액형/가능한 한 빨리/경기도 병원에서 시바견 OO이에게 헌혈해 줄 수 있는 친구 찾습니다.”
“내일 긴급헌혈은 1.2 혈액형의 주인공인 2살 래브라도 라프가 서울 관악에서 출동합니다.”

지난 11월 경기도에 사는 시바견 OO이는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헌혈해줄 수 있는 강아지를 애타게 찾았다. 다행히 서울 관악구에 사는 래브라도 ‘라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사례처럼 한국헌혈견협회 커뮤니티를 통해 헌혈해 줄 동물을 빠른 시간 내에 구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언제나 커뮤니티에서 즉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소중한 가족, 반려동물이 당장 응급 수술에 들어간다면 누구의 혈액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한국헌혈견협회 427호 헌혈견 라프가 헌혈을 하고 있는 모습. 한국헌혈견협회제공.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헌혈하려면 이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수의학계는 헌혈이 안전하게 진행되려면 몸무게 30㎏ 이상의 대형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은 아파트에서 기를 수 있는 소형 반려견을 선호하는 문화가 정착된 상황이라 헌혈 조건에 맞는 대형견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물 헌혈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법률도 없다. 법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개 주인들의 동물 헌혈 문화에 기댈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연유로 현재 반려견 수술 현장에서는 ‘다른 개에게 헌혈을 해주기 위한 용도’로 살아가는 공혈견의 혈액을 돈으로 사고파는 방식으로 수혈이 이뤄진다.

헌혈이 아니면, 어디에서 어떻게 피를 구할까?

동물 헌혈 외에 어떤 방법으로 피를 구할까. 수의학계는 “H사가 동물 혈액 수급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H사는 민간사업장으로 현재 국내 동물 혈액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업체다. H사는 피를 공여하는 ‘공혈견’, ‘공혈묘’를 두고 이들로부터 혈액을 얻은 뒤 전국의 동물병원에 혈액을 공급한다.

대구24시바른동물의료센터 이세원 원장은 31일 “수의사 대부분이 공혈동물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공혈동물 외에) 대안이 없다”며 H사를 통해 혈액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했다.

광주 동물메디컬센터 송정은 원장도 “헌혈견만으로 혈액 수급을 충당하기에 아직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당장 H사의 공혈동물이 없어진다면 수혈을 해야 하는 많은 반려동물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 혈액 수급 독점하는 민간업체 H사 관리 감독은?

H사는 과거 회사 내 공혈동물을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긴 바 있다.

동물권단체 ‘케어’와 동물권행동 ‘카라’는 2015년 10월 강원도 속초에 있는 공혈견 사육장과 대구시에 있는 공혈묘 사육 현장을 직접 찾아가 방치된 동물들의 실태를 폭로했다.

당시 케어는 “300마리 정도 되는 개들이 뜬 장 형태의 장 안에 한 마리씩 갇혀 있었다”며 “바닥에는 나무판 하나 깔려 있지 않아 성긴 망 위에 고통스럽게 서 있어야 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철창과 식기도 비위생적으로 방치된 모습이었다.

2015년 케어가 포착한 H회사 공혈견 사육장. 유튜브 캡처

케어는 현장에 수의사도 없었다며 공혈견으로부터 채혈하는 과정은 물론 혈액 공급 과정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을지에 의문을 표했다. 카라 역시 H사의 공혈묘 사육장을 “전형적인 고양이 번식장의 형태”라고 비판했다. 카라는 공혈묘 사육장에 햇볕이 들지 않고 악취가 진동했으며, 고양이를 위한 발톱갈이용 스크래처나 캣 타워 등도 없었고 관리자 역시 부재했다고 묘사했다.

2015년 카라가 포착한 H회사 공혈묘 사육장. 카라 제공

연이은 열악한 사육 환경 폭로에 H사는 개선 의지를 밝혔지만 2019년 공혈견과 공혈묘 생활사를 개선했다며 사진을 게시한 것 외에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케어와 카라 역시 H사의 강화된 보안과 폐쇄적인 시스템 때문에 이후 정보 업데이트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2019년 H회사가 게시한 개(왼쪽), 고양이(오른쪽) 생활사 개선사업 결과. H회사 홈페이지 캡처

국민일보 역시 이메일과 전화로 H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끝내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다.

당시 H사의 공혈견 처우를 폭로했던 케어의 박소연 활동가는 “(상태가) 전혀 개선됐다고 보지 않는다”며 “시설이 조금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누가 관리·감독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비공개로 운영되는 데 나아졌다고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공혈동물 공론화? 관심은 금세 시들


반려동물을 기르는 ‘반려가구’는 총 604만 가구로 한국 전체 가구의 29.7%를 차지한다.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1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가 집계한 것으로, 3가구 중 1가구에선 동물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다.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확대되면서 펫샵 근절, 반려동물 의료보험 도입, 진료비 표준수가제 등 동물복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동물 헌혈’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다.

공혈견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12년 무렵이다. 당시 SBS 동물농장에서 2003년부터 5년간 마약탐지견으로 활동하다 후각이 무뎌져 은퇴한 뒤 한 대학 동물병원의 공혈견이 된 ‘엣지’의 이야기가 방송되면서다. 이후 언론과 정치권에서도 공혈동물에 여러 차례 주목했지만 더 진척된 내용은 없었다.

2015년 H사의 열악한 공혈동물 관리 실태가 폭로되면서 또다시 이슈가 됐다. 당시 농식품부와 동물단체, 민간협회가 모여 이듬해인 2016년 ‘혈액나눔동물 관리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가이드라인은 ▲공혈동물의 명칭을 ‘혈액나눔동물’로 변경하고 ▲공혈동물에 제대로 된 영양 공급과 올바른 사육장 환경 조성을 조건으로 하며 ▲수의학적으로 규정된 개체별 1회 채혈량 (13~17㎖/㎏)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데다 대부분 동물병원에 제대로 공표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지침이 돼 버렸다.

2017년 당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동물혈액공급·판매업’을 신설하는 등 정부의 관리·감독하에 동물 혈액 취급이 이루어지도록 공혈동물제도를 양성화하자는 내용이 담긴 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김영호 의원도 2019년 공혈동물이 적절한 기준과 한도 내에서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혈액 공급업을 법제화하자는 내용의 ‘인도적 동물혈액 채취법’을 발의했다.

이렇듯 정치권에서 간헐적으로 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된 논의가 뒤따르지 못하며 입법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현대자동차와 한국헌혈견협회가 ‘아임도그너’ 등 동물헌혈 관련 캠페인을 추진했지만, 관심은 금세 시들해졌다.

헌혈 문화 정착 위해 꾸준한 관심 필요

실제 대책을 둘러싸고 수의학계와 동물 운동권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온도차가 크다. 수의학계는 법제화를 통해 공혈동물의 복지를 뒷받침하자는 현실적인 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다. 반면 동물권 단체들은 헌혈 문화의 보급을 통해 공혈동물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입장 차는 있지만 양쪽 모두 공혈동물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여론을 환기시켜 공적 논의의 장을 만들고 입법 과정 등을 통해 동물 헌혈 문제 등을 제대로 관리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카라의 김현지 활동가는 “2016년 가이드라인을 논의할 때도 담당 주무관의 보직이 변경되며 가이드라인이 일부 동물병원에만 배포되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공혈동물 이슈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정부 당국에서도 끝까지 가이드라인 발표 등 정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21년 마지막 헌혈견 곰이. 한국헌혈견협회에서 헌혈견에게 제공하는 노란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한국헌혈견협회 제공.

그는 “헌혈 문화를 정착시킨다는 게 참 어렵지만, 수준 높은 반려문화의 정착이라는 부분은 나의 반려동물에 대한 안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까지 포용할 때 이뤄지는 것”이라며 공혈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김미진 인턴기자
천현정 인턴기자
한제경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