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해외 도피 4개월 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과 탈레반 협상의 ‘희생양’이 됐으며, 수도 카불 함락 직전 해외로 도피한 것은 도시 파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했다.
가니 전 대통령은 30일(현지시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아프간 정부가 제외됐다며 붕괴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그는 “전임자(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처럼 계속 맞서기보다는 우리의 국제 파트너십을 신뢰했다”며 “국제사회의 인내심이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가니 전 대통령은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탈레반과 맺은 합의가 아프간 붕괴의 발판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과 탈레반은 평화 협상 대신 철수 절차를 진행했다”며 “그 거래가 우리를 지워버렸다”고 지적했다. 평화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탈레반의 이해관계만 반영되면서 아프간 정부가 불리해졌고 결국 카불 붕괴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을 ‘끝없는 전쟁’이라고 비판하면서 철군을 공약했고 그 성과가 지난해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 성사된 ‘도하 합의’다. 당시 협상 조건에 따라 미국은 미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맹군 병력 규모를 축소하고 포로 교환에 합의했다.
이후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와 회담하기로 합의했지만 지난여름까지도 이 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침내 조 바이든 대통령이 9월 11일까지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를 공식화한 후 탈레반은 아프간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평생 한 일이 무너지고 내 가치관이 짓밟혔다”며 “나는 희생양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사회를 신뢰한 것이 카불 몰락으로 이어진 데 대해 기꺼이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가니 전 대통령은 수년간 대통령 재직 중 드러낸 무능함에 대해서 비난받고 있다.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카불 함락 당시 해외로 도피한 결정이 아프간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두 시간도 안 돼 약속을 깨고 두 개의 다른 정파가 다른 방향에서 카불로 진격했다”며 “두 정파가 충돌할 경우 도시가 파괴되고 500만 시민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니 전 대통령에 따르면 그는 측근들에게 카불을 떠나도록 허락한 뒤 자신은 국방부로 가기 위해 차를 기다렸다. 그러나 차는 오지 않고 대신 겁에 질린 대통령 경호실장이 나타나 “저항할 경우 탈레반이 모두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 탈레반 병력이 주둔해 있던 코스트로 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으나 코스트와 잘랄라바드 모두 탈레반에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야 아프간을 떠난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말했다. BBC는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전날까지도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거듭 다짐해온 그가 갑자기 도주하면서 아프간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가니 전 대통령은 그가 수천만 달러를 챙겨 달아났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어떤 돈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며 “내 생활 방식은 모두가 안다. 내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나”라고 의혹을 일축했다. 이어 “의혹을 해소해 줄 어떤 국제 조사든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의 인터뷰는 아프간 국내 소셜미디어(SNS)에서 공분을 사고 있다. 하룬 라히미 전 아프간아메리칸대 교수는 가니 전 대통령과 측근들을 “겁쟁이 반역자들”이라며 “그의 인터뷰는 아프간 국민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