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도 못했던 인권단체 탄압’…사법부 장악해버린 푸틴

입력 2021-12-30 16:07
AP연합뉴스

러시아 최대 인권단체인 ‘메모리얼(기억)’은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다 반핵·반체제 운동가로 변신했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대한 구(舊) 소련 공산정권의 탄압 증거를 낱낱이 찾아냈던 단체다.

러시아 대법원은 29일(현지시간) 이 단체의 중앙조직인 ‘국제 메모리얼(Memorial International)’의 해산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단체가 외국의 대리기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출판물에 러시아 국내법에 따른 표기를 하지 않았으며 소련 시절의 역사를 왜곡·폄하해왔다는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지방법원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메모리얼 센터’의 폐쇄를 명령했다. 이 센터는 소련 시절 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자행됐던 각종 반인권 행위의 증거와 기록을 전시한 박물관과 도서관을 운영해온 메모리얼의 핵심 시설이다.

서방언론들은 이같은 판결인 내려지자 일제히 “끊임없이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젠 ‘마지막 남은 양심’인 대법원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됐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메모리얼은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다수 소속돼 있지만 정치활동을 하던 단체가 아니었다. 야당과 정치노선을 같이 한 적도 없었다.

메모리얼의 주된 활동은 소련 시절 자행됐던 소수민족 강제이주, 반체제 인사에 대한 불법구금과 강제노동, 일반시민에 대한 반 사법적 체포·구금·처벌의 증거를 찾고 이를 알리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이 단체가 수집한 소련 시절 인권탄압 피해자는 무려 130만명에 이른다. 메모리얼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주요도시 57곳에 지부를 두고 관련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해왔으며, 자체 발행 출판물을 통해 공산정권의 실상을 알리는데 온 힘을 다해왔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조지아 등 구 소련에 속했던 국가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등 서방국가에도 지부를 두고 인권탄압 기록 등을 순회 전시했으며, 푸틴 정권에서 늘어나는 활동 중단 압박도 공개해왔다.

메모리얼의 결성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 집권으로 ‘페레스트로이카(재건)’ 바람이 불어닥칠 때다. 러시아 전역의 반체제 인사와 학자, 인권운동가들이 모스크바에서 인권회의를 소집하자, 공산당과 KGB(국가정보국)은 이 회합을 무산시켰다.

모임은 무산됐지만 이들은 이듬해 3월 “잘못된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메모리얼을 결성해 인권탄압 피해자를 찾아내고 각종 기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탄압을 받긴 했지만 이 단체는 존속했고, 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이들의 활동은 만개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메모리얼의 해산을 결정하면서 러시아 대법원은 “외국의 스파이”라는 주홍글씨를 이 단체에 새겼다. 서방국가과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흑역사를 알리는 일이 반애국이라는 푸틴 정권의 주장에 적극 동조한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메모리얼의 해산은 서슬 퍼렇던 소련 공산정권도 감히 행하지 못한 일이었다”며 “이제 크레믈린은 소련시절의 흑역사조차 시인하지 못하는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선 셈”이라고 전했다. 또 “비정치적 활동에 전념하던 인권단체마저 반체제로 낙인 찍은 푸틴 정권의 다음 행보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고 평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