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61) 대장이 건넨 명함은 두툼했다. 아코디언처럼 접힌 6장짜리 초록색 명함을 펼치니 그의 30여년 도전의 역사가 함께 펼쳐졌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히말라야의 8000m 고봉 16좌를 완등한 대기록은 고작 한 장에 정리돼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그가 재단을 세워 네팔에 지은 학교 사진과 소개로 채워져 있었다. 그에게 학교를 짓는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실에서 네팔로 출국을 앞둔 그를 만났다. 그는 3주간 현지에 머물면서 학교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완공된 학교 운영현황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네팔에 못 가셨겠어요.
“1년에 대여섯번은 학교를 둘러보러 가는데 이번엔 2년 만이에요. 우리 재단은 완공 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보수 관리를 합니다. 현대식 건물에 시설이 좋으니까 주변에서 전학을 와서 학생이 늘어나는데 네팔 교육부는 교사를 충원해줄 여력이 없어요. 그럼 저희 재단에서 선생님들을 직접 채용하는 거죠.”
그가 네팔에 학교를 짓기로 한 것은 2007년 16번째 봉우리인 8400m 로체샤르 정상에 오른 직후. 이제 더이상 오를 고산이 없다고 선언한 그는 인생 2막으로 엄홍길휴먼재단을 세워 낙후된 네팔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 중심사업으로 자신이 오른 16좌만큼 16개의 학교를 짓겠다고 발표한 게 2008년의 일이다.
-벌써 16개 학교가 완공됐다고요. 지금 17번째 학교를 짓고 있고요.
“순번으로 따지면 17번째 학교가 먼저 완공이 됐어요. 히말라야 산자락 오지마을에 하나씩 지었는데 16번째는 수도 카트만두에서 한 시간 거리에 교육타운을 짓고 있어요. 초·중·고등학교와 체육관 도서관 마을회관까지 짓는 거죠. 예산이 많이 들어가서 공사가 더뎌지는 와중에 전남교육청에서 17번째 학교를 후원하겠다고 해주셨어요. 그 학교가 작년 1월에 먼저 완공됐죠.”
-그런데 왜 학교였나요.
“제가 산에 미쳐서 정상만 바라보고 도전을 외치며 살았죠. 그러다가 막바지 15좌, 16좌에 가까이 갈수록 너무 두려워지는 거예요. 경험이 많아지면서 산이 살아 숨쉬는 게 보였어요. 바람소리 눈소리를 들으면 돌이 떨어질 것 같다, 얼음덩어리가 쏟아지겠다, 이걸 알겠는 거예요. 그런데 16좌를 꼭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은 간절하니까 올라가지 않을 수는 없고요.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산과 무언의 대화를 한 거죠. ‘제가 죽으면 먼저 간 동료와 셰르파들의 자녀는 누가 보살피겠습니까. 히말라야가 저에게 정상을 허락하고 베푼 것처럼 저도 나누면서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살아서 내려가야 합니다.’”
-신과 약속을 하신 거네요.
“네팔 고산지대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처럼 셰르파나 포터가 됩니다. 그런데 등반이 워낙 위험한데다 외국 산악팀 어깨너머로 등반 기술을 배우니 사고가 잦아요.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할 여건이 안 돼서 가장을 잃었을 땐 너무 힘든 상황이 되거든요. 대물림되는 가난의 고리를 끊지 못해요. 아이들이 꿈을 갖고 소망을 이루게 하려면 배우고 깨우쳐야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교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절, 성당에 가면 자기 욕심대로만 기도하죠. 내가 잘 되게, 우리 가족이 잘 되게. 저는 그때 워낙 간절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나왔어요.”
-1호 학교는 대장님과 등반 중에 숨진 셰르파의 고향에 세웠다면서요.
“술딤 도르지라고, 제가 처음으로 잃은 동료예요. 1985년에 처음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86년에 두 번째 갔을 때예요. 추락해서 시신도 못 찾았어요. 집에 갔더니 홀어머니와 결혼한 지 3개월 된 열여덟살 아내가 있더군요. 첫 번째 학교는 그곳이어야 했죠. 그런데 그 팡보체 마을이 해발 4000m가 넘어서 여러모로 최악의 조건이었어요.”
-4000m면 일단 몸 상태가 어떻게 되나요.
“산소가 희박해서 고산증이 와요. 두통 메스꺼움 구토 무기력증이 생기고 심하면 뇌부종, 폐수종으로 굉장히 위험하죠. 그것도 그렇지만 거기는 차가 못 들어가요. 카트만두에서 경비행기로 산 아래 마을까지 건축자재를 갖다놓으면 야크라는 동물에 싣거나 사람이 지고 3박 4일 올라가야 학교 짓는 곳에 도착해요. 건축비보다 수송비가 더 들죠. 참 어려움이 많았지만 2010년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학교가 탄생했습니다.”
현재 16개 휴먼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은 6000명이 넘는다. 졸업 후엔 대부분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장학금을 주고, 필요한 경우 기숙사비나 하숙비도 지원한다.
-셰르파였던 아버지를 여읜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주고 있으시죠. 그중 대장님의 바람처럼 셰르파가 아닌 자기 길을 찾은 학생이 있나요.
“99년 봄에 저와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실종된 셰르파가 있어요. 아이 셋에게 학비 지원을 했는데 다 반듯하게 잘 자라줬어요. 그 큰아들이 토목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우리 재단 15차 학교 현장 소장이 됐어요. 본인도 뿌듯해했고 우리도 정말 자랑스러웠죠. 최근엔 네팔 건축기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는 사고로 장애를 얻었다가 재단의 도움으로 1호 학교 보건 교사가 된 여학생의 이야기도 꺼냈다. “팡보체 휴먼스쿨 준공식에 갔더니 다리를 저는 여학생이 있는데 꿈이 간호사라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가자, 나으면 장학금을 줄 테니 학교 보건 교사가 되라고 했죠. 그랬는데 수도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못 한다고 해서 엑스레이 필름을 서울로 가져왔어요. 마침 저희와 네팔 의료봉사를 했던 인연이 있는 서울성모병원 국제의료봉사팀에서 사정을 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시겠다고 했어요. 데려와서 병원 9층에 입원시켰는데 같은 병실 환자분이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잔다는 거예요. 넋을 잃고 야경을 보느라고요.”
-수술은 잘 됐나요.
“재활 훈련까지 마치고 두 발로 멀쩡하게 달리게 됐죠. 학교에 교실 하나를 진료소로 개조해 마을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게 했어요. 그곳이 약국도 없고 병원에 가려면 말 그대로 산 넘고 계곡 건너 3시간을 걸어가야 하거든요.”
-학교를 짓는 게 인생의 17번째 봉우리라고 하셨는데, 목표로 했던 16개 학교 건축을 11년 만에 다 이루셨어요.
“상징적으로 16개를 짓겠다고 했지만 저도 몇년이 걸릴지 몰랐어요. 8000m 16좌에 오를 때도 시한을 정해놓고 시작한 게 아니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산에 오르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내 두 번째 인생의 16좌에도 오르겠지, 하고 시작했던 거라서요.”
-1년에 3개를 지은 해도 있던데요.
“열 번째 학교까지는 사전에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어요. 후보지를 물색해놓고 ‘후원자가 있어야 하는데’ 하면 딱 나타나고, 짓고 있으면 다음 후원자가 또 나타나고. 10개가 넘어서면서부터는 탄력을 받았어요. 학교를 지으면서 제가 깨달은 진리가 있어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그 일은 분명히 이뤄진다.’ 그리고 그게 반드시 그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또 다른 좋은 일로 나에게 되돌아오더라는 거예요.”
-네팔은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중 하나잖아요. 다녀오면 행복을 충전한 느낌이 드나요.
“그럼요, 거기 아이들은 달라요. 모든 여건이 열악한데도 아이들의 눈빛과 영혼이 정말 맑고 깨끗해요. 국내에서 기부자를 찾아다니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다 학교에 가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면 ‘아, 학교 짓기를 잘했다, 빨리 더 지어야겠다, 더 잘 지어야겠다’ 엄청난 위안과 행복을 얻고 오는 거죠.”
-그런데 휴먼재단, 휴먼스쿨, 이름이 전부 휴먼이에요.
“사람과 사람, 인간과 인간, 인연과 인연으로 이어지는 휴머니즘적인 의미를 담았어요. 히말라야 정상에서 살아 내려가면 나누며 살겠다고 결심하니까 산 밑이 보이고,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보였어요. 처음 휴먼을 떠올린 건 저와 히말라야 등정을 네 번 같이했던 후배 박무택 대원이 2004년 에베레스트 8750m 지점에서 하산하다가 설맹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예요. 현장 사진을 받아보니 정상으로 가는 길목 절벽에서 줄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각국의 산악인들이 그곳을 지나가지만 줄을 끊고 시신을 내려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높이니까. 제가 수습을 하러 가겠다고 준비를 하는데 정상을 가기 위한 원정대가 아니니까 에베레스트 원정대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이 나온 거군요.
“네, 사고 1년 후에 ‘초모롱마(티베트어로 에베레스트를 부르는 말) 휴먼원정대’가 출발했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는 원정대는 히말라야 등반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 ‘히말라야’가 만들어졌고요. 그런데 올해 14좌 완등 후 하산하다 돌아가신 김홍빈 대장도 가까운 사이셨잖아요. 대장님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전부터 한번 가자고 했고 이번에는 특히 더 간곡하게 얘기했어요.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식사하면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브로드피크 그 지점을 진짜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가 95년부터 5년 동안 스페인팀과 등반을 했는데 그때 홍빈이 고향 선배도 거기서 추락했었어요. 결국엔 그 자리에서 또 사고가 난 거죠. 그냥 먹먹하고 답답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불현듯 다시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없으신가요.
“야생마가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단 일을 하면서 가끔 답답할 때는 다시 산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생겨요. 하지만 욕심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인생의 산은 계속 도전하고 있지만 대자연 속에 있는 산은 여기까지라고요. 16좌를 끝내면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 지금까지 허락한 것만 해도 나는 만족이라고요. 이 이상 또 다른 목표를 갖고 오른다면 그건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그때는 신이 나를 용납하지 않고 영원히 산에 잡아둘 거라고 느꼈어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기록을 가진 산악인은 세계에 44명뿐이다. 엄홍길은 그중 아홉 번째로 이름을 올렸고, 한국인은 총 7명이 성공했다. 14좌에 위성봉 2개를 더한 16좌에 오른 건 그가 세계 최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0명의 동료를 잃었고, 동상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절단했다. 98년 안나푸르나 등반 때 발목이 완전히 골절된 오른발은 지금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당시 더이상 산행은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았지만 10개월 만에 철심을 박은 다리로 기어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적이고 천운이라고 했다. 그는 22년 동안 38번 히말라야에 올랐다. 성공이 20번, 실패가 18번이었다. 그가 도전의 아이콘이 된 것은 성공과 비슷한 횟수인 18번의 좌절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도전과 극복, 목표와 꿈을 주제로 종종 강연하는 그는 ‘위대한 성공은 위대한 실패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동료의 죽음을 처음 겪은 게 스물여섯살 때였어요. 다시는 히말라야에 가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세 번째 시도 만에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고 나서 만약 동료를 잃은 슬픔과 공포에 주저앉아 있었다면 정상을 밟을 수 있었을까, 실패는 고통스럽지만 딛고 이겨내서 부딪치니까 성공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휴먼원정대도 모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시도도 안 했다면 무택이가 떠오를 때마다 평생 괴로움과 아쉬움에 살 것 아닙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하는 데까지 해보면 결국 포기하게 되더라도 후회는 없잖아요.
16좌 완등을 결심할 때도 그랬어요. 14좌라는 큰 꿈을 이뤄내고 난 후 인생에 목표가 없고 도전할 게 없다는 건 저에게 말도 안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두 개의 위성봉에 도전했죠. 저에게 성공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도전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겁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