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우리나이로 마흔인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38)의 연말은 바빠 보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예년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가족과 보낸 그는 통화 직전까지 아내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동하러 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니 아이들이 유독 좋아한다며 웃었다. 아들을 축구교실에 데려다줘야 한다며 또다시 나설 채비를 하는 그는 흔히 볼 법한 30대 후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K리그에서 그는 현재진행형 ‘전설’이다. 그는 리그 통산 110도움을 기록해 이 부분 역대 1위다. 이미 은퇴한 이동국이 77개로 2위인 걸 고려하면 당분간 도전자를 찾기 힘들 기록이다. 공격포인트(득점+도움)로 따져도 역대 3위다. 프리킥 득점은 17개로 과거 전북 현대에서 뛴 외국인 선수 에닝요와 함께 통산 공동 1위다. 소속팀 수원 삼성에서는 392경기 출장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염기훈은 지난 22일 수원과 재계약을 맺으며 다음 시즌까지 기간을 연장했다. 그와 내년에 K리그를 누빌 동갑내기는 생일이 한달여 빠른 인천 유나이티드 김광석, 석달 느린 성남 FC 김영광뿐이다. 그는 재계약 닷새 뒤인 지난 27일 국민일보와 통화하며 “수원은 솔직히 저에게는 집이나 다름없다”면서 “아직도 클럽하우스나 홈구장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고 설렌다. 떠난다는 생각을 전혀 못할 정도로 수원이 좋다”고 했다.
수원이 사랑하는 왼발
염기훈이 수원에 입단한 건 2010년이다. 내년이면 13년차다. 그보다 수원에 오래 있었던 선수는 한살 아래인 양상민뿐이다. 오래 있는만큼 구단을 향한 애정도 넘친다. 그는 수원 팬들이 홈구장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의 애칭)에 걸개로 내거는 ‘이 사랑에 후회는 없다’는 문구를 자주 인용한다. 팀 성적이 좋을 때는 그만큼 행복하다는 의미지만, 팀이 어려울 때는 힘들어도 함께한다는 의미다. 그는 “다른 것보다 유독 그 문구가 더 와닿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선우는 수원의 골수팬이다. 염기훈은 “아빠 따라서 수원 축구를 보다가 팬이 된 다른 어린 팬들과 같다”면서 “선우가 (수원의) 파란 유니폼을 계속 입을 수 있게 해줘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2018년 이적설이 돌았을 당시 팬들은 그를 수원에 남겨달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 끝 글자를 딴 ‘#지켜주세염’ 해시태그를 만들어 SNS에 올리기도 했다. 염기훈과 수원은 떼놓고 말할 수 없는 단어다.
염기훈은 수원에서 3차례 우승컵을 들었다. 다만 모두 국내 컵대회인 FA컵이다. 그가 수원에 입단한 시기는 하필이면 수원이 리그를 대표하던 강자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시기와 겹쳤다. 지난 시즌 강등 위기에서 허우적대던 수원은 올시즌 전반기 엄청난 기세로 리그 우승까지 넘보는 듯 했지만 후반기 맥없이 꺾였다. 파이널A(상위스플릿)에 턱걸이해 잔류경쟁에 휘말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염기훈은 이번 시즌이 팬들을 경기장에 돌아오게 할 적기였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입단 때만 해도 팬들이 경기장에 매번 꽉꽉 찼다”면서 “전반기 성적이 좋았을 때 예년처럼 입장이 가능했다면 많은 팬이 돌아왔을텐데, 선수들도 더 힘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너무 아쉽다”고 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에게 우리가 원래 이런 팀이라고, 엄청난 팬들이 있는 팀인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예전이 너무 그립다”고 했다.
새로운 시작
선수 생활 황혼기지만 염기훈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선수 생활 뒤 지도자 생활이나 창업 등에 따라붙는 ‘제 2의 인생’ 이야기가 아니다. 선수로서 완전히 다른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지난달 21일 대구 FC와의 경기에서 구단 통산 최다 출전기록을 경신했을 당시 들은 말이 크게 다가왔다. 함께 선수로도 뛰었던 김대환 골키퍼 코치가 해준 조언이었다.
“대환이 형이 축하해주길래 ‘오래 있으니까 이렇게 기록도 세우네요’ 했어요. 그랬더니 형이 ‘뭘 오래해, 이제 시작이야’라면서, ‘남들이 세운 기록 이제 깼으니 지금부터 시작이지’ 하더라고요. 한번도 그런 생각을 못해봤거든요. 이제 은퇴할 때 됐다, 언제 은퇴하든 괜찮은 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 들으니 정말 다르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나이 많은 저한테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왠지 새롭고 맞는 말 같고.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이란 새로운 역할을 의미한다. 이번 시즌 그는 주로 교체선수로 뛰었다. 프로 생활 이래 주전을 놓친 적이 드물었기에 벤치가 낯설었다. 몸관리 방법도, 마음가짐이나 팀 내 역할도 달라야 한다는 걸 그는 시즌이 지나며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는 “갑자기 변화를 맞다보니 처음엔 힘들었다”며 “이번엔 교체선수로서 후배들을 도와주며 궂은 일을 할 자세로 시즌 전부터 준비한다.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된다”고 했다.
염기훈에게는 어린 시절 변화에 적응해 최고가 된 경험이 있다. 본래 오른발잡이였던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자전거를 타다 오른발을 다치면서 자연스레 덜 아픈 왼발로 공을 차기 시작했고 그게 ‘왼발의 달인’으로 불리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는 “오른발을 쓰다가 왼발을 쓰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면서 “변화에 빨리 대처를 하고 이걸 어떻게 이겨나가갈지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선 닮았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염기훈은 평소 후배들에게 함부로 먼저 조언자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다. 염기훈은 “나이가 있다보니 후배들에게 먼저 가서 알려준다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후배들이 물어보면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알려준다”고 했다. 같은 팀 내 최고참이지만 자연스레 수비수 양상민은 수비수인 후배들에게, 염기훈은 공격을 맡은 후배들에게 주로 충고를 건넨다고 했다.
그가 롤모델을 삼는 건 대표팀 선배 박지성이다. 그는 “지성이 형은 말수가 많이 없어서 별 말을 안한다. 하지만 선수들이 다 따라나선다”고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 대선수지만 경기 끝나면 선수복이 엄청 더러워져 있거든요. 지성이 형이 먼저 적극적으로 몸도 날리고 머리도 집어넣으니까 후배들도 자연스레 따라가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솔선수범하고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요.”
시즌 중반 팀이 부진할 무렵 염기훈은 팀내 불화설에 휩싸였다. 그와 감독·후배들 사이 관계가 악화했다는 소문이었다. 급기야 직접 SNS에 해명글을 썼다. 그는 “없던 얘기가 나오니까 그냥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켜보니 해명을 안하면 진짜처럼 받아들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단에서도 심각하게 상황을 보는 듯했다”면서 “내가 정말로 이제 이 팀에 도움이 안 되나, 그래서 이런 루머도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내년은 여느 때보다 축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끄는 월드컵의 해다. 염기훈은 국가대표로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예선에서 대표팀을 본선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본선 명단 발표 직전 갈비뼈가 부러져 탈락했다. 그는 “신태용 (당시 대표팀) 감독님이 명단 발표 전에 월드컵에 데려갈 거라고 해놓은 상황이었다. 다치고 나서 감독님이 경기장에서 만나 ‘너 나 X 돼 보라는 거지?’라고 웃으며 말했던 게 아직 기억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대표팀 경기를 다 챙겨본다고 한 그는 “(대표팀이) 월드컵은 꼭 나가야 한다”며 운을 뗐다. 그는 “월드컵에 못 나가면 대표팀도 큰일이지만 K리그도 죽는다. 한국 축구가 다 죽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대표팀에 유럽에서 뛰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 다행이다. 월드컵에서 강팀과 싸워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며 “아무것도 모르고 나갔던 저와 달리 지금 어린 선수들은 더 큰 꿈을 꿀 수 있어 나을 것”이라고 했다.
후회없는 끝을 준비하며
염기훈의 올 시즌 목표 중 하나는 지난 시즌 직전 세운 ‘80골-80도움 클럽’ 달성이다. 물론 그보다 절실한 목표는 아직 선수경력 내내 이루지 못한 리그 우승이다. 은퇴 뒤에는 지도자가 꿈이다. 전성기를 이끌어준 은사 서정원 감독이 모델이다. 그는 “그때 감독님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 저렇게 선수들과 신뢰를 쌓는 지도자가 되어야겠다고, 스승과 제자 이전에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 서로 간에 저런 신뢰를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물론 축구장 밖에서도 그의 삶은 바쁘다. 살고 있는 경기도 화성 동탄에서 이름을 건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처제의 남편이 총감독을 맡아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차범근 축구교실’처럼 좋은 선수들을 배출하는 게 목표다. 축구를 하는 아들에게도 종종 프리킥을 알려준다. 아들은 ‘아빠는 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놀아줘야 한다’며 선을 긋지만 프리킥만큼은 한 수 접고 배운다. 염기훈과 같은 왼발잡이다. 그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아내가 일부러 공을 왼발에 갖다 놓으며 왼발잡이로 키웠다”면서 “재능이 있다. 수비수로 키우려 한다”며 웃었다.
수원에는 팬이 많다. 염기훈에게도 개인 팬클럽인 ‘염기훈월드’ 식구들이 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오래된 친구들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할 말을 묻자 염기훈은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다음 시즌에는 전반기 좋았던 모습을 유지하도록 베테랑으로서 맏형으로서 선수들을 다독이겠다. 팬들이 더 많이, 오래 웃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할 테니 응원해달라는 얘기를 꼭 전해달라”고 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