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 아동의 진술 녹화물을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한 특례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뒤 법조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장 법정에서 아동이 겪을 2차 피해를 막기엔 현재의 제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보호 공백에 놓인 아동 피해자를 위한 입법과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지난 23일 동석한 신뢰관계인에 의해 진정 성립이 인정된 경우 성폭력 피해아동의 진술 녹화 영상물을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한 특례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피해 아동이 법정에 나와 다시 피해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겪을 트라우마와 공포감 등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헌재는 “이 규정으로 인한 피고인 방어권 제한 정도가 매우 중대하다”며 “해당 조항은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헌재가 단순 위헌 결정을 내리자 한국여성변호사회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즉각 비판 성명을 냈다. 헌재가 아동 성폭력 범죄사건의 공판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변은 “미성년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진술의 약점을 탄핵하고, 성폭력 피해 경험을 샅샅이 복기하도록 하는 반대신문 과정에서 아동이 입을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 정제된 신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헌재도 8년 전인 2013년 12월엔 비슷한 내용의 특례조항(옛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8조2 제5항)이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2013년 12월 26일 헌재 재판관 6인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거친 법정 반대신문보다는 사건 초기 생생한 기억 속에서 이뤄진 진술 녹화와 이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이 실체적 진실 발견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다수 의견을 제시했다.
중계장치에 의한 신문이나 피고인 퇴정 조치, 신뢰관계인 동석 제도 등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다른 조치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재판관 6인은 “해당 제도는 공포감 완화에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끔찍한 피해경험에 대한 반복적 회상을 강요받게 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며 “2차 피해를 막는 대안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3인의 재판관은 “입법 목적의 중대성을 감안한다 해도 피해아동의 보호만을 앞세워 반대신문권을 박탈하는 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로부터 요구되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를 갖추지 못한 것”이라는 반대의견을 냈다.
아동이 법정에서 반복 진술을 하도록 하는 게 곧 실체적 진실 발견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친족에 의해 이뤄진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족들의 회유·압박, 해당 가족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인해 진술이 번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해 5월 10대 딸에 대한 아버지의 강제추행 혐의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이러한 우려를 담고 있다. 당시 대법원은 10대 초반의 딸을 강제추행하고 학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아버지에게 강제추행 등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피해자는 수사기관에서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추행 사실을 진술했지만 1심 법정에 와서는 ‘피고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실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 때문에 1심은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피해자의 초기 진술에 주목한 2심 재판부는 판단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전문가의 피해자 수사기관 진술 분석 결과 ‘사건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온 점, 피해자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가 ‘피해자가 가족들이 눈치를 많이 줬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빨리 꺼내야 한다고 욕을 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 역시 피해자의 번복된 법정 진술은 믿을 수 없고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을 신빙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한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전문가들은 위헌 결정이 나온 이상 피해 아동 보호를 위한 현실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법 개정을 위한 유예기간이 마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피해 아동은 바로 법정에 나와야 할 수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법정에서 아이가 진술하는 공간이 아동 친화적으로 꾸며져 있어야 하고, 피고인의 반대신문도 직접 목소리가 들리거나 사용한 단어가 그대로 전달되는 형태로 이뤄져선 안된다”며 “아동 성폭력 사건을 심리하는 법관도 아동의 언어와 진술에 대한 뉘앙스를 파악하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역시 최소한의 조치일뿐 국회와 소관 부처의 고민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