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이 대통령되더니… 코미디가 된 우크라 현실

입력 2021-12-26 16:27 수정 2021-12-26 16:59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뉴시스

현재 우크라이나 북서쪽 국경엔 정예 러시아군 17만5000여명이 각종 첨단무기로 무장한 채 호시탐탐 침공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서방과의 협상 와중에도 전쟁 고조 분위기를 결코 낮추지 않고 있다.

이처럼 조국이 전쟁 위기로 치닫는 와중에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관심사는 엉뚱한 곳에 집중돼 있다. 방어선을 지킬 국방부와 외교부의 핵심 포스트는 장군도 외교관도 아닌 코미디언과 배우, 연출가와 극작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5일(현지시간) 코미디언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이 집권 이래 정부와 대통령궁 측근들을 자신의 옛 동료와 일가친척들로 채우는 측근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는 TV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대통령 역을 맡았다 2019년 4월 대선에 출마해 순식간에 대통령이 된 인물. 1991년 독립이후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를 가릴 것 없이 집권세력마다 부패와 무능에 허덕이자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정치 경력이 전혀 없던 그를 “참신하고 청렴한 인물”이라며 국가 수장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집권하자마자 정부 주요 요직과 대통령궁 보좌관들을 자신의 측근들로 채워왔다. 측근들이란 그가 속했던 코미디·영화·TV프로그램 제작업체인 ‘크바르탈 95 스튜디오’ 소속 인사와 일가친척들이었다.

NYT는 우크라이나 탐사보도 매체인 비후스를 인용해 이런 측근 30여명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정보국의 수장은 젤렌스키와 오랜 동안 일해온 크바르탈95 스튜디오의 시나리오 작가와 PD가 맡고 있는 형편이다.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우크라이나군의 방어전략을 짜야할 지휘부에 정보통도 군사통도 전혀 없는 셈이다.

최측근인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궁 실장은 영화제작사 대표 출신이고, 국가정보국장인 이반 바코노프는 크바르탈95스튜디오 대표감독이었던 인사다. 최측근으로 항상 젤렌스키 옆을 지키는 대통령보좌관 세르히이 쉐피르는 TV시리즈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

신문은 “젤렌스키의 인사 기준은 능력과 정치적 비전, 전문성 등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에 대해 충성심을 갖고 있느냐”라며 “코미디언으로 채워진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번 위기 이전에도 많은 실책을 범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국가정보국 요원들에 의해 적발된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스파이 2000여명을 바코노프 국장이 체포하지 않고 면죄부를 준 일이 대표적이다. 젤렌스키가 이들을 이용해 러시아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스파이들은 이번 군사 위기 국면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러시아에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NYT는 드미트로 라줌코프 전 하원의장의 말을 인용해 “우크라이나 정치는 마치 한편의 코미디 호러 드라마와도 같다”면서 “전문가가 없는 정부, 외교관이 없는 외교부, 장군이 없는 군지휘부가 언제 붕괴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