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레따’, 10년간 관객과 함께 웃고 울었다

입력 2021-12-26 12:23 수정 2021-12-26 15:40
배우 강애심과 안무가 장은정, 최지연, 김혜숙(왼쪽부터)이 지난 23일 서울 대학로의 아르코 대학로극장 라이브스튜디오 대학로 공작소에서 리허설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들 4명은 ‘춤추는 여자들’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그룹을 결성한 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의 2012년 초연부터 공동안무를 맡는 동시에 출연해 왔다. 이한결 기자

러시아에서는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들어서는 2주간을 ‘바비레따’라고 한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5번째 계절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중년 여성에게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찬사다. 젊은 시절보다도 더 화사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012년 1월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라는 제목의 관객참여형 공연이 처음 선보여졌다. 권태감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 공연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중년 여성만이 아니라 누구나 공연에 참여할 수 있다. 이후 이 공연은 무용계에선 드물게 초연 이후 전국 28곳에서 74회나 공연됐다. 오는 30~31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은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의 10년 여정을 돌아보고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이하 ‘바비레따’)가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공동안무 겸 출연해온 안무가 장은정(57·장은정무용단 대표) 최지연(57·창무회 대표) 김혜숙(53·김혜숙댄스리서치그룹 대표) 그리고 배우 강애심(59·극단 고래 단원) 등 4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춤추는 여자들’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그룹을 결성한 이들은 타악 연주자인 조민수 그룹 움 대표와 함께 춤판을 통해 중년여성의 아픔을 치유해 왔다. 지난 23일 아르코 대학로극장 라이브스튜디오 대학로 공작소에서 만난 ‘춤추는 여자들’은 ‘바비레따’가 이렇게 긴 생명력을 지닌 작품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의 2014년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 공연. 장은정 제공

“2005년 무렵 제가 해오던 현대무용 작업에 지치고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요. 당시 무용계의 이슈였던 ‘무용의 대중화’와 관련해 관객과의 소통이나 교감도 고민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최지연과 김혜숙 등 또래 동료들과 종종 만나서 고민을 나누었어요. 그러다가 2011년 제가 연극 ‘살’에서 움직임을 맡게 됐는데, 거기서 배우 강애심 씨를 만나면서 작품이 점차 구체성을 띠게 됐죠. 이 작품에서 사회자 역할도 맡는 강애심 씨는 그동안 관객 관점에서 저희 무용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발견하게 해줬습니다.”(장은정)

‘바비레따’는 무대와 객석이 구분된 일반적인 공연 형태를 벗어나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어울리고 함께 호흡하는 것이 큰 매력이다. 강애심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관객을 자연스레 공연 안으로 끌어들인 뒤 출연진 모두 관객과 함께 어우러지는 춤판이 벌어진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손을 잡고 춤을 추다 보면 해방감과 에너지가 샘솟는 동시에 위로를 얻게 된다.

“‘바비레따’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관객들 덕분이에요.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관객들이거든요.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관객만이 아니라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강애심)

‘바비레따’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들은 몇몇 그룹을 섭외해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러다가 2011년 8월 제10회 춘천아트페스티벌의 장승헌 예술감독과 최웅집 총감독의 제안으로 춘천의 중년 여성들과 워크숍을 진행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20분 남짓의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바비레따’의 닻을 올리게 됐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의 2012년 인천아트플랫폼 공연. 장은정 제공

“춘천에서 주말마다 몇 차례 워크숍을 진행했는데요. 당시 신청을 받아서 30~50대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20명과 함께 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동안 서로 공감하게 됐습니다. 날것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춤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어요. (이들이) 매너리즘에 빠진 저희에게 춤의 즐거움과 생명력을 깨닫게 만든 거죠.”(김혜숙)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 이후 본격적으로 공연을 올리기로 계획한 이들은 이듬해 초 아르코 예술극장의 스튜디오 다락을 대관했다. 사우나에서 친구들끼리 달걀을 까먹으며 수다 떠는 기분을 주는 ‘바비레따’에는 제대로 된 공연장보다는 옥탑방을 연상시키는 스튜디오가 제격이었다. 초연 당시 일주일간의 공연은 입장 인원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관객이 많이 왔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화두 삼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보는 과정으로 진행된 공연은 관객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도록 만들었다.

“지금도 첫 공연이 기억나요. 솔직히 관객이 얼마나 올지 걱정했는데, 뚜껑을 열어 보니 저희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그때 저희끼리 10년만 참고 해보자고 한 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솔직히 5~6년 정도 됐을 땐 정말 힘들었는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힘든 걸 잊어버리게 돼요. 이 작품이 관객들의 참여로 완성되다 보니 매번 관객이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공연이 된다는 게 성공의 키워드인 것 같아요.”(최지연)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가 지난 10월 제주도 성산읍 블루마운틴 4255 야외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장은정 제공

‘바비레따’는 초연 이후 입소문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 예술프로젝트, 신나는 예술여행사업,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방방곡곡사업, 문화가 있는 날 직장문화배달사업에 선정되는 한편 강동아트센터, 인천아트 플랫폼, 창무국제무용제 등에 초청돼 관객들과 춤으로 소통했다. 또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 바비레따’를 진행하기도 했다. 여타 공연과 달리 후불제(공연 관람 후 원하는 만큼 지불)를 채택하고 있지만 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금액이 들어온다는 후문이다.

“‘바비레따’는 춤을 통한 치유를 지향하는 장소특정형 공연입니다. 그런데, 초연 당시 관객 참여형 공연이 그다지 없던 때라 어느새 커뮤니티 댄스의 ‘시조새’로 평가받게 됐어요. 초연 이후 전국 곳곳을 다니며 버스킹을 다니고 싶었는데, 기쁘게도 많은 곳에서 저희를 찾아줬어요.”(장은정)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도 ‘바비레따’는 꾸준히 공연됐다. 지난 2년간 끈을 이용한 비접촉 버전, 온라인을 이용한 비대면 버전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과거에는 출연자와 관객이 손잡고 춤판을 벌였다면 비접촉 버전의 경우 직접 손을 잡는 대신 고무줄을 붙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장은정 등 ‘춤추는 여자들’은 “비록 팬데믹 이전처럼 손을 직접 잡지 못하고 고무줄이나 랜선으로 대신해야 했지만,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이번 10주년 공연은 팬데믹으로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만큼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어 “관객 참여형 감성 치유 프로젝트 ‘바비레따’는 앞으로의 10년은 자기다움과 자기 돌봄을 키워드로 내년부터 새롭게 출발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