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위 대신 사과합니다”…고민 안긴 장애인의 글

입력 2021-12-21 00:02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20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이동권 보장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 중증장애인이 20일 장애인단체가 출근길에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지하철 승하차 시위를 한 것에 대해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사과했다.

이 글의 작성자는 “대신 사과한다. 저라도 출근하는데 시위 때문에 막힌다 생각하면 못 참을 것 같다”면서도 “장애인은 정부 복지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그런데 그 복지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낀다”며 장애인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설명했다.

지하철 승하차 시위는 열악한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사회 전반에 알리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출근이 늦어지는 등의 피해를 보는 건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어서 ‘을’과 ‘을’의 소모적인 갈등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대신 사과한다”는 글을 올린 작성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상대를 탓하고 공격하는 악순환을 벗어나 함께 고민할 화두를 던지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자신을 중증장애인이라고 밝힌 A씨는 20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현 장애인입니다. 오늘 시위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오전 7시쯤 서울 5호선 왕십리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진행하면서 열차 운행이 지연된 일을 염두에 둔 글이다.

“솔직히 과격한 듯…대신 사과”

A씨는 이 글에서 “저렇게 안 하면 묻히는 사정도 있고, 왜 그러는지 그 심정만큼은 십분 이해되기는 한다. 제가 그 당사자여서 너무 잘 알기도 한다”면서도 “이렇게 시위하는 건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제가 대신 사과드린다”며 “지금 저 단체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단체로 도매급으로 욕먹고 있는 상황이니까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데 시위 때문에 막힌다 생각하면 저도 못 참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20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열차에 탑승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어 “제 성격이 모질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다. 당하고 살더라도 남한테 피해 주는 방법은 저 하곤 안 맞는 것 같다”며 “솔직히 너무 과격한 것 같다. 장애인들도 사람이다, 장애인들끼리도 당연히 생각 및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자기 생각을 밝혔다.

A씨는 이번 일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인해 장애인의 인식이 많이 안 좋아진 것 같다”며 “모든 장애인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이라고 다 선하지는 않지만, 다 이기주의에 피해의식 강하고 악한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복지 체감 어려워”…어려운 현실 하소연도

A씨는 사과 글을 적으면서 동시에 정부 복지를 체감하기 어려운 현실을 언급했다. 그는 “제가 비록 중증장애인이기는 하나, 정부에서 받고 있는 복지들을 거의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A씨는 지하철 요금 감면, 통신요금 20% 감면, 가스 및 전기요금 정액 할인 등의 복지혜택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만 30세가 넘어 독립하면 월 52만원의 생계급여에 장애인연금 3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월세에 살면 추가로 주거급여 30만원을 받는다”며 “이게 저희가 받는 복지”라고 설명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가 열린 20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 경찰 병력이 배치돼 있다. 연합뉴스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기초생활 수급이 필요한 데, 부모님 집에서 거주 중이라 (기초수급은) 안 된다고 한다”며 “평생 부모님이랑 같이 살 수도 없는데, 부모님 형편도 그리 넉넉한 건 아닌데 너무 죄송하다고 항상 느낀다”고 말했다.

A씨는 이같이 받는 복지를 특권으로 보기 어려운 현실을 설명했다. 그는 “장애가 무슨 특권도 아니고 뭘 더 바라는 거냐고 할 수 있는데, 중증 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받는 제약은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애인 일자리가 아니면 사실상 취업이 불가능하다. 공기업·공무원 가산점은 경증 장애인들 전용 혜택이나 다름없다”며 “면접 볼 때 같이 일하기 힘들 것 같으면 그냥 탈락시킨다. 웃긴 게 장애인이어도 최대한 티 안 나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은 매일 겪는 불편…살려는 몸부림

A씨는 지하철 승하차 시위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장애인들은) 정부 복지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사람들”이라며 “그래서 자꾸 정부한테 뭘 요구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그 복지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고, 이런 상황이 몇십 년간 반복됐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인데 이게 맞나 이런 생각이 든다”며 “좋게 말하면 듣는 척도 하지 않으니까. 지하철 출근 시위하면 사람들 주목은 확실히 받으니까 이렇게 사태가 변질된 것 같다”고 부연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20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열차에 탑승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A씨는 글 말미에서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 지하철 시위에 대해서는 “집단 이기주의 같은 게 아니고 살아보고 싶어서 치는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그 방법이 잘못되기는 했지만”이라고 말했다.

A씨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시각장애인을 위한 알림 소리에 시끄럽다고 짜증 내는 시민들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본인들이 겪는 불편은 느껴도,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은 못 느끼는 것”이라며 “이번 시위로 느끼는 불편을 장애인들은 매일 겪고 있다고 생각해 달라”며 글을 마쳤다.

이동권 보장 시위, 2001년 오이도역 참사로 시작

장애인단체의 이동권 보장 시위는 2001년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리프트에서 떨어져 아내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지난 4월 기준 서울 지하철 역사 283곳 중 261곳(92.2%)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지난 2015년에 서울 지하철 내 엘리베이터를 2022년까지 100% 설치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2022년도 서울시 본 예산에 관련 예산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보장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전장연은 2025년까지 시내버스·마을버스 저상버스 100% 도입, 2022년까지 특별교통수단 782대 도입 약속 이행, 장애인 버스 10대 도입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시위는 오는 22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교통법안심사소위 안건으로 오른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안’ 등의 심사를 촉구하는 차원에서 열렸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