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파격적인 무대는 그 시절 보다 뜨겁게 전진하며 연출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전쟁음?악!>시리즈와
연극연출가 최용훈(59)을 만났다. 그는 1986년도(7월)에 극단을 창단하고 연극 연출가로 데뷔한다. 1985년도는 서울미문화원 점거 농성으로 반미(反美)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였고 군부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탈환하기 위해 시민과 대학생의 처절한 민주화 투쟁의 시대였다. 최루탄은 살인의 폭력으로, 삶의 허무로 대학가를 폭격했다. 대학가는 ‘마당극’으로 시대의 분노를 표현했고, ‘민중음악’은 지워지지 않는 최루탄 먼지로 싸여가는 암울한 시대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6월 항쟁의 시대’(1987) 함성이 되었고, 불덩이 같은 고문실은 “탁 하고 치니 억”하고 박종철 열사(烈士) 죽음을 은폐했고 권력은 물과 전기로 그의 숨통을 막았다. ‘호헌 철폐’와 ‘직선제’를 외치던 이한열 열사의 함성은 최루탄 탄두(彈頭)로 아스팔트에 묻혔다.
연극계도 마찬가지였다. 검열의 시대였고 권력은 조작과 은폐로 언론과 시민, 대학생들을 검열했고 정부 산하 단체인 ‘공연윤리위원회’는 희곡의 살점을 날리던 시대였다. 권력을 타격하고 시대를 은유하는 연극과 정치를 풍자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대학생이었고 연극으로 말하고 싶었다. 80년대를 넘고 90년대에 들어 최용훈은 한국 연극의 변화를 주도하며 여전히 작품을 생산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연출가다.
인터뷰는 <믿을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보고 만나려고 했다.
“요즘 정신없는데, 마지막 공연이고 청운대학교 뮤지컬 전공 학생들 수업하고 <봄 작가, 겨울 무대> 작품 연출도 있어서 뒤로 미뤘으면 좋겠어”라고 문자가 날아왔다. 일주일 뒤 대학로에서 만난 최용훈은 <개가 된 남자>를 연출하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된 뒤 들어선 그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고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영화 현장’은 놀이터였고 연극 한 편으로 연극 연출가의 삶을 선택한 최용훈은 “영화보다 연극이 강렬하게 다가왔고, 대학 시절부터 40년 가까이 연극만 바라보며 살고 있죠.”
― 최용훈은 90년대 연장선에서 도전적인 항해(航海)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어수선한 주변 소리 대화를 집중하기 위해 탁자 사이로 몸을 앞쪽으로 숙였고 톤은 컸다. “철학을 전공하셨더군요.”
“아버지께서 영화감독이셨기 때문에 어릴 때 영화 현장과 연극을 많이 보러 다녔어요. 대학 갈 무렵 ‘연극영화과’ 보다 ‘대학연극반’ 공연이 활발했지요. 아버지가 연극을 하려면 인문학을 배우라고 조언하셨어요. 당시 연극은 사회적인 저항처럼 메시지가 컸지요.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연극을 하던 시절이었고요. 철학은 연극에 토양이 되기도 하고요. 서강대학교 <서강연극회>에 들어가서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한국영화계에 거목으로 평가 받는 영화감독 故 최인현(경남 진주) 감독이다. 극단 작은 신화가 <전쟁음?악!>(1990)을 공연하던 무렵 62세로 타계한 그의 아버지에 대해 한 영화 평론가는 ‘경남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최 감독은 교편 생활을 하다 영화계에 입문한 엘리트로 사극의 대인’으로 평가했다. 1962년도 <눈물 어린 발자국>으로 데뷔했고 최인현 프로덕션(1968)을 설립했다. <태조 이성계>(1965), <태조 왕건>(1970), <이조상노비사>(1974), <홍길동>(1976), <집념>(1976), <관세음보살>(1978), <세종대왕>(1978), <소명>(1984) 등 6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제1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영화 <집념>으로 대종상 5개 부문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업적(業績)을 남겼다.
— 영화 현장이 놀이터였는데 ‘영화’보다는 <연극>에 더 흥미를 느꼈군요.
“어릴 때 놀이터가 촬영 장소였죠. 중학교 무렵 영화도 보고 연극을 보러 다녔는데, 연극 한 편이 색다르게 느껴졌어요. 영화 하고는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무대에서 살아있는 것 같았고 강렬하게 다가왔지요. 무대 현장성이 영화하고는 방식이 다르게 느껴졌어요. 그 한 편의 연극으로 중학교 때부터 연극 연출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연극만 보러 다녔고 고등학교(숭실) 들어가서도 제가 선생님을 졸라서 연극반을 만들고 연극만 하며 살았죠.”(웃음)
최용훈 연출은 ‘서강연극회’에서 활동하던 <이유철, 최용훈, 임민섭, 박정영, 임애리, 김영인>등이 모여 “한국 연극계에 만연되고 있는 상업주의를 극복하고 연극 본래의 예술성을 회복하는 데에 연극을 사랑하는 젊은 의식으로서 일조한다.”는 등 5개 항목으로 된 <창단선언문>을 발표하고 졸업을 앞둔 13명이 극단을 창단한다. <불어를 하세요?>(1986>, <잠이 자고 싶은 사나이>(1987>, <아침, 정오 그리고 밤>(1987> 을 공연하며 최용훈 연극 문법을 익혀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전쟁음?악!>(1990)으로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90년대 극단 작은 신화시대를 열게 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기 극단 시스템은 ‘동인제’나 연출 체제로 운영이 되었고 조연출을 거쳐 도제식 훈련을 통해 연출로 데뷔하던 시절이었다.
대학교 연극반 출신이 주축이 된 작은 신화의 등장은 신선했고 무대는 파격적이었다. 연극반 출신으로 구성된 극단은 서울대 출신 ‘연우무대’ 정도였는데, 연우는 초기에 서울대 출신으로 배우와 단원들이 활동했다.
“시스템이 달랐어요. 공동창작을 표방한 것은 작은 신화가 유일했던 시대였죠.”
최용훈 연출과 극단 작은 신화 작품 <전쟁음?악!>시리즈를 연속으로 무대화하면서 기존 형식을 탈피하려 했고 연극인들도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해체와 재구성의 파열음은 공간의 이미지로, 배우의 언어로, 도전적인 형식과 문법으로 90년대 연극을 주도(조광화, 김광보)하며 한국 연극의 세대 교체를 변화시키는 극단이 된다. 시리즈 연극이 전무(全無)했던 시절이었다. <전쟁음?악!> 시리즈 1은 미국 반전 연극을 모티브로 했는데 재현 방식을 과감하게 탈거(脫去)한 해체와 재구성의 파열음은 공간의 이미지로 날 것의 연기로 도전적인 형식과 문법으로 표현시켰고 재료를 넣지 않아도 무대는 활력이 넘쳤고 연출 시선은 날카로웠다.
|90년대 <전쟁음?악!>,
― <전쟁음?악!>,
“배우들과 단원들이 다양하게 연구를 하며 작품 개발을 했어요. 내 연출 스타일이 희곡과 작품에 따라 구현되는 방식이 다른데 그 당시에는 배우들이 텍스트로 무대 공간을 채우던 시절이었지요. 좀 색다른 연극적인 표현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는데, 단원들도 믿고 따라준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 시대에 연극으로는 매우 신선했었던 것 같아요. 오브제와 배우 그리고 무대 공간을 통해 다양한 창작극을 실험적으로 작업하고 싶을 때였고 그것을 표현해준 작품들이지요.”
―극단 작은 신화는 90년대 연극의 세대 교체를 이루면서 연극 문화를 주도해 왔다. 여전히 최용훈 연출의 작업 방식과 공동 작업이 파워가 느껴진다.
“당시 연극 문화는 창작극보다는 번역극을 주로 공연하던 때였어요. 극단 작은 신화를 만들어진 것도 우리 연극 창작극을 개발해 보자는 의도로 출발했지요. 극단도 대학 연극반 출신들이 모여 극단도 공동으로 운영해보자는 취지에 단원들이 많이 모였어요. 극단 초기 배우들과 단원들이 모여서 작품도 개발하고 실험적인 연구도 많이 할 때였지요. 무대 공간에서 배우들과 다양한 창작 작업을 시도했고 그것이 당시에는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 같아요.”
― 작품마다 표현 방식이 다르게 나타났던 것 같다. 연출 스타일이 다양했는데.
“희곡이나 작품 따라 다르다. 작품마다 작가 이야기가 담겨있고 결이 따르기 때문에 무대에서 표현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작품을 읽고 우선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입력해 놓지요. 작품마다 특징이 있고 구현의 방식은 다른데, 어떤 장면에서는 공간이 중요하게 다가올 때가 있고 배우 역할이 크게 드러나야 할 때도 있어요. 아, 이 작품은 무대의 공간으로, 저 작품은 무대의 입체감으로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연출의 설계도를 그려 놓지요. 작가의 메시지들이 다양하고 색(色이 달라서 하나의 특정한 표현 방식 보다 희곡에 따라 변화되는 게 당연하지요.”
<전쟁음?악!>시리즈와
상복도 넘쳤다. 1994년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체육부장관)을 출발로 영희연극상, 희서연극상, 김상열 연극상,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올해의 예술인상과 한국연출과협회 올해의 연출가상(2016)을 받았고 연극 연출 외에도 많은 일을 해왔다. 대표 작품은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 <콜라소녀>, <제향 날>,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황구도>,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똥강리 미스터 리!>, <차이메리카>,
|93년 <황구도>을 출발로 ‘우리 연극 만들기’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는 그는 앞으로 작은 신화는 200명 이상의 단원들로 채우고 싶고 그들이 “연출, 연기,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길 바란다”라고 했다.
-연출은 93년도부터 <우리 연극 만들기>프로젝트를 통해 신진 작가 작품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연극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늘 새로운 작품과 작가를 만나면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작은 신화 방향성이기도 하고 희곡은 중요해요. 극단도 창작극을 지속해서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극단에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기존 작품은 많이 공연했고 연출로 더 신선한 작품을 기대하게 되지요. 다양한 창작극을 연출하려면 작가를 찾아야 하고 그 작가의 작품을 발굴 하는 것도 역할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신진 작가 작품들을 많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좋은 작품을 만나고 그 작품을 연출하게 되면 그게 연극을 하는 이유이고 힘이 나지 않나요? <우리 연극 만들기>는 극단 작은 신화의 한 축이지요. 연출로 새로운 희곡을 만나면 무대에서 어떻게 연출로 전달할지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집니다.”
― 13명으로 창단한 작은 신화 단원은 30년을 넘기며 120여 명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200명, 그 상의 단원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고, 연극만 하는 극단 작은 신화 그룹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단원 120명이 모여 극단 운영은 방식은?”
“이제 작은 신화는 단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며 잘 굴러가요. 체계가 잡혔고 작은 신화의 질서가 존재해요, 단원들끼리 스터디나 워크숍 팀들도 자율적으로 구성해서 하고 있어요. 신입 후배들과 워크숍, 훈련 등을 챙기고 작품 연구도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고요. 작은 신화 단원이 될 때는 엄격한 편이죠. 극단이 공동 운영체여서 단원들 생각도 중요합니다. 신입 단원은 선배 단원들이 공동으로 결정해서 단원이 됩니다. 그 뒤로는 개방적인 극단이에요. 각자 극단 작품도 참여하고 우리 극 만들기 연극도 함께하면서 외부 작품도 자율적으로 하는 편이죠. 한 달 1만 원 정도를 내고 기본적인 운영비로 씁니다. 극단을 나갈 때도 자유로운데 거의 나가는 단원들이 없어요(웃음).
작은 신화만의 독특한 질서와 연극 문화가 존재하는 겁니다. 여전히 작은 신화 단원들(길해연, 이재형, 반무섭, 홍성경, 장용철, 서현철, 정세라, 임형택 등)이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도 후배들이나 극단 작품을 많이 챙기는 편이고요. 외부 활동을 한다거나, 프리랜서 활동을 하더라도 극단 작은 신화의 단원들의 연대 의식은 강하지요. 이러한 극단의 분위기 때문에 작은신화 출신의 작가, 연출, 배우들이 상당히 많아요.”
올해 아트리버(김효준)에서 기획한 ‘76 페스티벌’ 참가 작품 <믿을지 모르겠지만>(김이율작)을 올렸다. 이 작품은 극단 작은 신화의 ‘우리 연극 만들기’로 발굴한 작품으로 초연이었다. 평가는 좋았고 14명의 배우들은 무대를 채웠다. 창작극을 녹여내는데 최용훈의 무대를 당기는 요리 솜씨가 여전히 녹슬지 않아 보였다. 그는 신진 작가 작품을 무대화 하고 장막희곡으로 창작 기회를 마련하고 있는 ‘봄 작가, 겨울 무대’도 인연이 깊다. 문화예술위의 국내 대표적인 극작가 육성프로그램으로 2008년도에 시작해 2013년까지 운영되다 잠시 중단되었다. 2018년도에 4개 작품 4명의 연출로 부활해 운영되고 있다. 최용훈은 아르코예술극장 예술감독(2007~2009, 극장장) 시절에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어린 잎은 나란히>(신윤주 작, 윤혜진 연출), <유니온>(이철용 작, 박세련 연출>, <개가 된 남자>(박세향 작, 최용훈 연출) 3개 작품을 2021 ‘봄 작가, 겨울 무대’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올렸다.
|여전히 ‘봄 작가, 겨울 무대’ 신진 작가 작품을 연출하며 최용훈은 90년대처럼 뜨겁게 달려가고 있다.
-올해 ‘봄 작가, 겨울 무대’에서 박세향 작 <개가 된 남자>를 연출하셨더군요. 경륜 있는 극작가와 작업을 할 수도 있는데. 신진 작가의 작품 연출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봄 작가, 겨울 무대’는 아르코예술극장 예술 감독 시절에 기획한 신진 작가 양성프로그램입니다. 우리 연극 만들기를 해왔기 때문에 작가 양성이 제도적으로 절실했어요. 신진 작가와 젊은 연출가들 무대 기회가 많아야 합니다. 민간 극단이나 제작 극장에서 운영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요. 국공립극단과 창작 지원을 제도적으로 할 수 있는 기관에서 지속해서 해야 합니다. 특히 문화예술위원회가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밀고 나갔으면 해요. 신진 발굴을 위해 더 많은 프로젝트가 개발되어야 하고 지원과 창작 환경이 제도적으로 육성되어야 합니다. 박세형 작가는 대구 출신이지요. 대구시립극단에서 객원 연출로 몇 작품을 했었고 인연이 많아요. 작가 작품 중에 신춘문예 작품 <노을이 너무 예뻐서>를 ‘제30회 신춘문예 단막극전’에서 연출을 했었고 이번 겨울무대도 같이 하게 됐어요. 개처럼 살아가는 삶을 부러워하다가 개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그들 가족의 이야기죠. 연출하면서 바뀐 부분이 많은데 작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웃음)
-최용훈 연출은 세계연극제 사무국장, 서울연극협회 부회장, 서울연극제 운영 감독을 거쳐 서울연극제예술감독, 국립극단 사무국장과 한일연극교류협의회 부회장 등 연극 연출 외적으로 많은 일 들을 했다.
“그것을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고요.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항상 연극과 무대만 생각하고 달려온 인생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욕심을 부린 적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는데 국립극단도, 서울연극제 예술감독도, 크고 작은 페스티벌 예술 감독을 맡게 된 것은 한 곳만 달려가니까 일을 하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작업을 하면서 후배 연극인들이 더 발전하면 좋죠.”
- 30년을 넘겨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극단이 드물다. 작은 신화는 6년 뒤 창단 40주년이고 여전히 90년대처럼 뜨겁게 달려가는 것 같다.
“극단을 창단하고 의도하고 달려오지는 않았어요. 늘 연극 속에 있었고 그게 최용훈의 삶이지요. 단원과 작품을 개발하고 공연을 하면서 연극 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무대와 연극 만을 생각하면서 달려왔지요. 그러면서 연출 외에도 여러 일을 맡게 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어요. 앞으로 50주년 그 이상 될 때까지 극단을 유지하고 싶고 뜨거웠던 90년대처럼 살아가고 있고요. 단원들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한마음으로 연극을 하는 식구들이 많으면 좋지 않을까요?. 작은 신화 단원들이 앞으로 연출, 작가, 배우 등 다양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봄 작가, 겨울 무대’ 공연을 의식한 듯 최용훈은 시계를 바라봤다.
극단 작은 신화 30년으로 발간된 우리 연극, 우리 창작극의 기록 <지금 여기, 변화하는 극단 작은 신화 30년 자유로움> 책을 건네주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기록들이 책에 다 있어.”라고 말했다. 인터뷰 사진을 촬영하는데도 “이쪽, 저쪽” 하며 만드는 공간 설정이 연출가답다.
그와 공연되고 있는 대학로 예술극장 앞에서도 사진을 촬영했다. <개가 된 남자> 대형 포스터 앞에 선 그의 표정은 극장과 무대에서 그가 연출한 작품을 지키고 있을 때 행복해 보였고 표정도 편안했다. 그가 극장으로 향한 뒤 그가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극단 작은 산화를 창단하고 지금까지 어떤 연극을 만들까 고민하면서 연극에서 살아 온 겁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고요, 앞으로도 그래야죠.”
최용훈은 극단 작은 신화를 50년 이상 지키며 여전히 새로운 연극에 도전할 것 같았다.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