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60세에 트렌스젠더 맏 언니로 살아가는 배우 신현종

입력 2021-12-19 12:19

“이젠 연극인들에게 존중 받을 수 있는 대학로 연극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이달 16일부터 공연되는 연극 <사라지다> (극단 고래, 이해성 연출)에서 트렌스젠더 맏 언니 <말복>으로 돌아온 배우 신현종(60)은 1986년 극단 광장에서 <어두워질 때까지>(문석봉 연출)로 데뷔한 후 36년 동안 연극무대에 서 왔다. 인터뷰 장소로 나온 그는 명동예술극장에서 26일까지 공연되고 있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연출 신유청)에 출연 중인 아내 전국향에게 줄 커피부터 주문했다. 펜으로 눌러 쓴 출연 연보를 들고 나왔고 160여 작품이 되어 보였다.

“성 소수자 트렌스젠더 역할까지 왠만한 배역은 배우로 다한 것 같아.”
차에서 기다리는 아내한테 커피를 주고 돌아온 그의 소리는 중·저음이었고, 미세한 음절(音節)도 정확했다. 높고 낮음과 말의 리듬 변화는 무대에서의 대화로 느껴졌다.

신현종이 연기하는 하는 것을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라이슬리 존슨’ 역으로 분할 때 공연을 보았고, 이듬해 마당세실극장에서 <토끼와 포수>(1992)를 올리면서 주인공 장기호 역할을 맡을 때가 두 번째였다. <아가씨와 건달들>(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국내 대중뮤지컬의 가능성과 흥행을 몰고 왔다.
그는 이 작품으로 1500 회를 공연하고 극단 광장에서는 <레미제라블>을 마지막으로 8년 정도 극장 <광장> 배우 생활을 정리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레미제라블은 여인숙 주인(떼나르디) 역을 맡아 아내 전국향과 공연한 작품이다.

“그 시절에는 연극을 하는 재미가 있었어. 극단 광장은 창작극보다는 뮤지컬을 더 많이 하던 시절이었고. 와이러스 무선마이크가 없던 시절에 스탠드 마이크 5대로 뮤지컬을 했어. (웃음)” 연극 <토끼와 포수>를 끝내고 공연을 자주 보겠다는 말은 그 뒤 “내 공연은 언제 봐?”라는 대답이 날아왔고 배우 신현종 작품을 몇 편 봤는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가 출연한 <산불> (김철리 연출, 1995)를 꺼냈다. 김 노인으로 분한 그는 “감자 탄다”라는 즉흥 대사에 당시 관객은 웃음을 터트렸다. “즉흥대사 했다고 김철리 연출한테 욕 많이 먹었던 작품이야.” 작품을 소환하자 “<아가씨와 건달들>을 포함해 올해까지 다섯 작품 정도 본 것 같네”라며 웃었다. 그는 물 한 컵을 마시고 소리는 마이크를 향했다.


| 연극 <사라지다>에서 60대 트렌스젠더로 돌아온 배우 신현종. “배우가 다양한 역할에 도전 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죠.”

― 배우 신현종은 다작(多作)을 많이 했더군요. “그는 웃었고 볼펜으로 쓴 출연작품 연보를 천천히 올려봤다.”

“내가 배우로 쓰임새가 있으니까 많이 불러주셨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 많이 하게 됐는데, 1년에 8~9편 정도를 한 것 같아요. 2012년부터 2014년도에 집중적으로 많이 한 것 같군요. 술 먹는 시간 빼고는 작품 연습하고 공연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불러주는 작품이면 더블 캐스팅이라도 하려고 했어요. 좋은 후배 연출들을 만났고 그들과 연극 작업하는 게 좋았어요. 배우로 작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다작을 많이 하게 되었죠.”

그는 40대부터 배우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했다. <늙은 자전거>(안경모 연출), <정의의 사람들>(문삼화), <분홍나비 프로젝트>(정범철), <70년 전>,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박근형),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김승철), <밀실 수업>(신동인> 등 후배들과 함께한 작품을 말하며 장면의 기억을 떠올렸다.

―60대에 이해성 연출 <사라지다>에서 트렌스젠더 역할을 맡았군요.

“연출한테 전화를 받고서 1초 망설임도 없이 그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배우로 또 다른 캐릭터를 도전하고 싶었죠. 현실에서는 제가 살아볼 수 없는 역이잖아요. 연출한테 물었어요. ‘제가 그 역할의 이미지가 있느냐고요’, 연출은 페이스북에서 후배들한테 대하는 태도나 글에서 여성적인 따뜻함을 느꼈다는군요”(웃음)

―연극< 사라지다> 등장인물들이 흥미로운데요. 상강·신정·청명·동지·말복 등 우리의 24절기에서 인물명을 차용한 것 같다.

“ ‘말복’이라는 인물은 결혼도 하고 웨딩숍을 운영하면서 애들도 있는 인물이에요. 60대에 정체성을 찾아 수술하게 되죠.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트렌스젠더가 됩니다. 유일하게 성 소수자인 말복을 인정하던 친구가 있어요. 그의 딸(윤주)을 친자식처럼 생각했는데 사고로 죽게 되고 1주기 기일(忌日)에 6명이 모여 연극이 시작돼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 이야기인데, 인간적인 이들의 고뇌를 표현하고 말하고 싶었죠.”

―60대에 여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 소수자’ 역할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배우의 ‘인물 되기’는 힘든 과정이죠. 성 소수자 포럼에도 배우들이 참여했어요. 삶의 방식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몇 번을 봤고요. 우리 딸이 이 배역을 맡아서 한다니까 드라마, 넷플릭스 등 역할에 도움 될 만큼 영상들을 찾아줘서 도움이 됐어요. 배우로 느끼는 특징은 트렌스젠더 분들이 손동작, 표정, 웃음 등이 조금 과도한 동작을 해요. 배우로는 낮은 톤인데, 소리에서도 특징을 잡고 있어요. 제가 100% 남자인데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배우로 색다른 도전인 셈이죠.”


| 1980년대부터 160여 편의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존재감을 들어낸 배우 신현종은 “배우의 삶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배우가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이 컸다. 38년 간 언론사에서 근무하고 논설위원으로 정년(停年)을 한 부친은 어린 시절부터 ‘연극’을 보고 오라며 초대권을 쥐어 주었고 중학교 2학년 때 손숙 선생이 13살의 소년을 연기한 연극 <홍당무>를 본 기억을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한국일보사 8층 극장에서 임영웅 연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古) 함현진, 김성옥 선생의 연기를 보고 연극배우의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77년도에 함현진 선생이 ‘이란’으로 연극 심포지엄을 가셨는데 현지에서 의문사를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당시 존경하던 배우의 죽음이 충격이 컸고 연극에 흥미를 잃게 됐죠.”
연극에 흥미를 잃게 되자 재수하던 시절 아버지는 대학 연극과 원서를 아들에게 건넸고 81년도에 서울예술전문대(현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배우가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들이 연극하고 무대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셨죠. 제가 걱정 없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버지 덕분이죠.”
그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바꾸었다. 그는 2008년도에 작품 <길>로 ‘히서연극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아버지가 계셨다면 연극배우 신현종이 상을 받아 좋아하셨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다. 기쁘게 보실 것 같고, 앞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공연 작품 연보를 보니까 ‘노인’ 역할을 많이 하셨군요.

“20대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던 시절이었다면, 30대는 노인 역할을 너무 많이 했어요. 무대에서 존재감 있는 역할은 처음 맡은 것은 91년도에 <카바레> 뮤지컬에서 70대 유대인 술추역을 맡을 때였죠. 황혼의 로맨스를 이루는 장면이 있는데 아내 전국향 씨가 상대역이었어요. 이 작품에서 이별하게 됩니다. (웃음)

그는 출연한 160여 작품 중 <유목민 리어>(손정우 연출)가 기억이 남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리어왕을 각색해서 2인극으로 만든 작품이었어요. 광대와 리어 두 인물이 등장 하는데 광대를 통해 리어 삶과 인생에 연민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품이죠. 세 딸과의 갈등은 1인 연기를 통해 상황을 보여주었고 대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정말 감사한 작품이지만 2인극으로 풀어낸 작품이라서 셰익스피어 원작의 힘을 정통 리어왕 연기로 다시 해보고 싶어요. 이순재 선생님이 85세에 리어왕 연기를 하시는 게 부럽고요. 리어의 인간적인 모습과 내면을 신현종만이 해낼 수 있는 연기로 풀어내고 싶어요.”

노인과 악역, 때로는 악질 검사로도 분했고 시대의 정치인도 맡았었다. 경비원, 일본인, 아버지, 시인 등 그가 맡은 배역은 다양했다.
“다양한 인생을 무대에서 살아 볼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행운”이라는 그는 국내 대표적인 모노드라마 <염쟁이 유 씨>는 3년 정도 전국을 다니며 400회 정도를 공연했다.
박정희 시대 김형욱을 모델로 한 <밀실수업> (2019>에서는 권력의 사이에서 부정과 악을 저지르는 인물로 분했다. 이런 그에게 <신춘문예 연기상>(2007), <고마나루 연극제 연기상> (2011), <2인극 페스티벌 연기상>,<한국 연극배우협회 올해의 배우상>(2015), <임홍식 배우상> (2016),< 대한민국연극제 최우수 연기상>(2018)이 돌아갔다.


―모 연극인은 배우는 60살이 넘어야 제대로 인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 한 적 있다. 환갑(還甲)에 ‘배우의 길’ 중반 반환점을 돌고 있는데 배우의 삶은 어떤지 물었다. “말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시간의 장면들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포스터 붙이고 극단 사무실에서 자던 시절을 겪으면서 걸어왔는데 돌아보면, ‘배우의 삶’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배우의 삶을 살아가는 길은 힘들죠. 포스터 풀칠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고 무대에서 에너지는 고갈되던 시절이었어요. 4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연극’ 열심히 하라고 지원을 해주셨고 그 덕분에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은인(恩人)이시죠. 그렇게 달려온 연극배우 인생입니다. 이제 배역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신현종 다운 무대를 그려내는 것이 더 중요하고요. 제 이름에 무대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할 나이가 되었고 더 성실해지고 싶어요. 그것이 배우의 운명이고 배우의 길이 아닐까 생각돼요.”

―160여 작품 중 배우 신현종의 ‘연기’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소리가 중·저음이라서 오래전에는 연기가 무겁다는 사람들도 있고, 안정적이라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30~40대까지 필요 이상의 연기를 한 것 같아요, 주어진 역할을 과하게 들어낸 거죠. 연기도 나이만큼 익어가는 것 같아요. 배우가 무대에서 들어내지 않을 때 그 인물이 보이는 것인데, 그것을 체득할 때까지 20년이 걸린 것 같아요. 이제 무대에서 제가 돋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후배 연기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배려하는 선배, 후배를 존중하는 선배가 되고 싶고요. 신현종 배우의 삶이 후배들한테 롤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정직하게 무대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30, 40대에도 많은 작품을 했는데 연기적인 면에서 ‘과했다’라고 생각하는군요.

“수백 편 해도 만족할 수 없는 게 배우의 삶이죠. 배역에 몰입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배우는 평생 무대에서 도전하며 살아가는 직업인 것 같아요. 돌아보면, 연기가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감정과 표현이 과하게 전달 될 때 실패를 하는 것 같아요. 배우로 욕심을 버리고 무대에서 내려놓으니까 오히려 인물이 보이고 배우 신현종도 보여 지는 것 같습니다. 왜, 선생님들이 ‘연기하지 마, 연기 하려고 하지 마’ 하시잖아요. 그 말씀이 정답이죠. 무대에서 욕심을 버리니 연기가 부드러워지고 인물과 동일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고 할까요."

― 36년 정도를 무대에서 배우로 살았다. ‘배우’로서 중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배우들이 있다고 생각해. 기술적인 표현은 능숙할지 몰라도 연기의 기술은 한계가 있어요. 저는 30년 동안 인물 분석을 철저하게 하는 편이지요. 기술적인 접근보다는 배우 가슴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인물을 채워가면 내면(內面)도 달라지는 것 같고요. 우리나라 연극 배우들이 훌륭한 게 가슴으로 연기의 체온을 느끼고 표현하는 분들이 정말 많이 계세요. 감성적인 감각만큼 연극 배우 분들이 탁월하세요. 평생 무대에서 ‘따뜻한 가슴의 소리로 연기’하고 싶어서 4년 전부터 철저하게 운동합니다. 일주일에 5일 정도 하루 2시간 운동을 하는데, 무대에서 버텨야 하니까요. 연기는 대본에 답이 있어요.”

―어떤 배우는 ‘연극 배우 인생이 힘들다’고 말하고, 다른 배우는 ‘연극’ 만큼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예술이 없다고 하던데.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연극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더 훌륭한 인물로 살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웃음) 대학에서 소중한 아내를 만났고 평생 두 사람이 배우로 살아가는 것도 행복하죠. 딸도 밝게 자랐고 보컬트레이너를 하면서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연극 배우로 다양한 인생을 원 없이 살아봤으니 좋아요. 이만한 인생이 또 있겠어요? 가장 존경하는 배우가 아내 ‘전국향’ 씨입니다.” (그는 아내를 향해 항상 존칭을 썼다)


| 아내 전국향을 배우로 존경하고 “기회가 된다면 연극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요”

그의 말이 진심(眞心)으로 들렸다. 배우 부부로, 연극인 부부로 살아가는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작품 <사랑을 주세요>(2000)에서는 삼촌과 조카(전국향)로 나왔다. 그는 “조카를 괴롭히는 역할이어서 너무 신 났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황금 연못으로 가는 길>(1999)에서 배우 전국향은 엄마로, 남편 신현종은 아들로 분했고 <요셉과 마리아>(2015, 박정석 연출)에서는 요셉과 마리아로 분해 그해 2인극 페스티벌에서 부부가 공동으로 연기상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50대 중반의 백화점 경비원과 청소부의 로맨스를 그린 연극이었는데 무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씬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아내인 배우 전국향 씨를 배우로 존경한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들렸어요.

“가정주부로 낙제점일 수 있는데 좋은 배우죠. 연습부터 공연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몰입해요. 집에서도 저랑 연습하고 잠 잘 정도로 배역에 관한 공부를 철저하게 하는 배우예요. 꿈속에서도 연극을 꿈꾼다고 할 정도죠. 연극과 배우를 진정하게 대하는 게 남편으로도 부러울 때가 있어요. 아내는 다음 생(生)에도 연극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배우 전국향을 배우 신현종이 존경할 수밖에 없죠.”

―부부 싸움도 연극적으로 할 것 같은데.

“부부 싸움은 많이 하는데 일방적으로 제가 지는 싸움을 합니다.(웃음) 저는 아내한테 지는 게 좋아요. 인정하면 됩니다. 대체로 제가 잘못해요. 집에서는 가정을 위해 살고 싶다.” (그는 아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깊어 보였다.)



―80년대 후반부터 대학로에서 연극을 해온 배우로 바라보는 요즘 대학로 문화는.

“대학로 문화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가슴 아픈 것이 연극을 좋아하는 관객이 점차 감소한다는 겁니다. 연극 공연을 하면 배우와 연극인들이 좋은 의미로 ‘품앗이’를 합니다. 순수 관객들은 늘지 않고 있는 현실이 가슴이 아프죠. 코로나 19로 대학로 공연장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고요. 아무래도 연극인들이 연극을 더 열심히 보러 다니는 편이에요. 연극을 보면서 또 배우는 거죠. 1년에 50-60여 편 작품들을 보는데 제대로 된 ‘연극인 할인’ 제도가 없어요. 할인을 받아도 1∼2만 원이 넘고요. 하루 7~8시간 아르바이트해서 연극 한 편을 보는 겁니다. 지원을 받지 않으면 생존(生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연극인들을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돼요. 요즘 대학로 소극장들이 매물로 나와요. 소극장 건물주만 살아남는 현실이 가슴이 아프죠.”

―그는 대학로 연극 문화와 현실을 얘기하면서 말은 몇 차례 끊겼고, 감정은 변했다. 배우 신현종은 대학로 연극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요즘 대학로 연극이 두 가지로 나뉘어요. 젊은 창작자 작품을 보면 아이디어가 좋고 배우들도 활력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작품은 대학극 수준도 안 되면서 공연은 3만 원 이상 됩니다. 문제죠, 연극을 생존(生存)으로 평생 직업으로 대하는 순수 연극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데, 협회에 가입할 수 있는 극단과 개인들의 조건도 완화되어 2년에 2개 작품 이상이면 가입이 돼요. 우리 연극을 만만하게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배우는 연극을 하다가 매체로 가서 스타가 되면 ‘연극하면서 고생했다. 가난하게 연극을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저는 가난하다고 생각하질 않아요. 오히려 연극은 물질의 풍요보다는 인생에 큰 위안을 받고 살아가는 삶이죠.”


―배우 신현종은 대학로 연극 문화 변화와 연극인들한테 존중 받을 수 있는 ‘서울연극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작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대학로 연극 문화로 변화를 위해서 그는 ‘이훈경’(극단 지하창작소 제자백가) 인물론을 내세웠다.

“내년 1월에는 서울연극계에 중요한 행사가 있습니다. 서울연극협회장 선거죠, 회원들이 직선제로 선출하는 선거인데, 제가 후배를 돕고 우리 연극인들의 문제를 조금이라고 해결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이훈경’이라는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대하는 태도가 정직하고 심성이 좋은 연극인이에요. 연극 행정도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탁월합니다. 요즘은 여성연출가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 틈에서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요. 연극인들 복지와 정책도 참신한 생각도 많고 행정 능력이 탁월하죠.

장점이 많은 후배 연극인입니다.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도 있고요. 연극인들을 포용하고 공감과 협력으로 서울연극협회 회원들을 한목소리로 끌어낼 수 있는 자질도 있죠. 대학로 연극문화, 복지와 발전적인 정책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適任者)라 생각해서 저도 돕고 싶어 결정한 겁니다. 저는 40~60대 이상의 연극인들을 위한 정책을 도와주고 있어요. 배우로 무대에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이번에는 후배를 도와서 우리 연극인들의 협회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기도 하고요.”

배우 신현종은 앞으로 200여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나이가 있는데 250여 작품으로 올려야 하지 않겠어요” 물으니 “맞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라고 한다.
“이제 나이가 육십갑자를 돌고 나니까 배우로 새로운 1살로 돌아가서 다시 배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우선 200편을 채우고 신현종만의 러어를 연기하고 싶다.”

인터뷰를 끝내고 1~2시간의 연습 시간이 남아있는데도 60대 트렌스젠더로 분하고 있는 <사라지다>(선돌극장) 연습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나이에 연습실에 늦게 가는 것도 후배 보기 무서워”라는 배우 신현종은 무대에서 연기로 말했고, 무대 밖에서는 온기 있는 선배로 연극을 지켜온 것 같았다. 그가 연극을 대하는 36년의 진심은 비로소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보였다.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