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음주 상태로 과속 운전을 하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여자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30대 남성에 대해 법원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명 ‘오픈카 사망사고’ 로 알려진 이번 사고에 대해 법원은 운전자인 남자친구의 살인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고 음주 운전 혐의만 받아들였다.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장찬수)는 16일 살인 및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된 A씨(34, 인천)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2019년 11월 10일 새벽 1시쯤 제주시 한림읍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렌터카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내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여자친구 B씨(28)를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당시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18%로 만취 상태였다. A씨는 시속 114㎞로 질주하다 도로에 세워져 있던 경운기와 연석 등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당시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있던 B씨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갔다. 머리를 크게 다쳐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이듬해 8월 결국 숨졌다.
검찰은 A씨가 B씨가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사실을 안 직후 제한 속도 시속 50㎞ 구간에서 100㎞가 넘는 과속 운전을 해 고의로 사고를 냈다며 살인죄를 적용했다. 앞선 재판 과정에선 사고 직전 조수석에서 안전벨트 미착용 경고음이 울리자 A씨가 B씨에게 “안전벨트 안 맸네?”라고 말한 뒤 굉음을 내며 과속 운전을 한 정황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범행 동기와 관련해 “피고인이 피해자의 본인 위주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사실은 인정되지만 살인으로 이어질 만큼 앙심이나 증오, 집착 등 극단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함께 차에 타고 있던 상태에서 고의로 사고를 내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검찰의 주요 기소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 피고인과 피해자의 대화 상태를 고려할 때 어두운 새벽 시간 만취 상태였던 운전자가 피해자의 벨트 미착용 사실을 알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계획할 여지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살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던 ‘오픈카’ 렌트에 대해서는 “지붕이 없는 오픈카이기 때문에 운전자인 피고인 역시 다칠 것을 우려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피해자만 다치게 할 생각이 있었다면 급가속 후 급제동을 하는 등 피고인에 유리한 다른 방법이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고 했다.
사고 직후 피해자 모친에게 사고 상황을 알리고 동생에게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점, 사고 이후 피해자 병원에 면회를 갔던 점 등 여러 상황을 볼 때 사고 고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간접 증거만으로도 살인 혐의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있지만 이 경우 압도적으로 우월한 간접 증명이 전제돼야 한다”며 “검찰이 제시한 정황과 증거는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기소 내용 중 음주운전에 따른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었다.
앞서 경찰은 A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위험운전치상) 위반과 도로교통법(음주운전) 위반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이 피해자 휴대전화에 녹음돼 있던 내용 등을 토대로 고의 교통사고를 주장하자 검찰은 올해 4월 A씨를 위험운전치사가 아닌 살인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공판 말미에 이번 사건을 치사 혐의로 심리하지 못한 데 대해 “당초 검찰에 예비적 공소사실로 위험운전치사 혐의를 추가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으나 검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법원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피해자 측 변호인은 공판 직후 취재진과 만나 “검찰과 함께 피고인의 혐의를 치사로 변경해 항소심을 진행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은 “증거 관계와 법리를 엄정히 검토해 살인죄가 성립되는 것으로 판단해 기소했다”며 “판결 이유를 면밀히 검토해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전해왔다.
공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고인은 형이 선고된 후 가족과 함께 말없이 법원을 빠져나갔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