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원리를 무시한 채 답항을 고르라는 것과 다름없어 부당하다.”
1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부장판사 이주영)가 출제오류 논란에 휩싸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날 재판부는 “피고가 2021년 11월 29일 2022학년도 대학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제 정답 5번으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한다”고 선고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앞서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은 지난 2일 평가원을 상대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정답을 5번으로 유지한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논란이 된 생명과학Ⅱ 20번은 집단Ⅰ과 Ⅱ 중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 유지되는 동물 집단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선택지 3개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지 평가하는 문항이었다. 수험생들은 지문에 따라 계산하면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가 되는 오류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는 데 문제가 없다며 기존 정답을 고수했다.
“기존 답 고수하는 평가원, 생명과학 원리 무시하라는 것”
이날 재판부는 수험생 측의 주장을 모두 인정했다.재판부는 “이 사건 문제에서 제시한 조건을 사용하여 동물 집단의 개체 수를 계산할 경우 특정 유전자형의 개체 수가 음수로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생명과학의 원리상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일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해 “주어진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집단Ⅰ, Ⅱ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수능 과학탐구 영역을 평가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했다. 재판부는 “문제에 포함된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추리·분석·탐구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라며 “출제자는 수험생들이 논리성 합리성을 갖춘 풀이방법을 수립하여 문제해결을 시도할 경우 정답을 고를 수 있도록 문제를 구성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이 전제에 따르면 평가원이 출제한 문항은 부당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을 포함한 일부 수험생들은, 피고가 의도한 풀이방법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논리성·합리성을 가진 풀이방법을 수립하여 이 사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며 “그 과정에서 이 사건 문제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정답을 선택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수험생들에게 이 사건 문제의 정답을 5번으로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사건 문제에 명시된 조건의 일부를 무시하거나, 생명과학 원리를 무시한 채 답항을 고르라는 것과 다름없어 부당하다”며 평가원을 비판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판단을 종합해 “이 사건 문제의 정답을 5번으로 선택한 그렇지 않은 수험생들 사이에 유의미한 수학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결국 이 사건 문제는 대학교육 수학능력 측정을 위한 수능시험 문제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고 결론 지었다. 수능 시험이 본래 가져야 할 전제를 일탈한 문항이었다는 평가다.
수능 본질서 벗어나…“특정 풀이법 찾기 몰두 우려”
재판부는 더 나아가 평가원 주장대로 정답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수험생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지적했다.재판부는 “만일 이 사건 문제의 정답을 5번으로 그대로 유지한다면, 수험생들은 앞으로 수능시험 과학탐구 영역에서 과학 원리에 어긋나는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그러한 오류가 출제자의 실수인지 의도된 것인지 불필요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능시험을 준비하면서 사고력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출제자가 의도한 특정 풀이방법을 찾는 것에만 초점을 두게 될 우려도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재판부는 문제의 문항 오류에 대해 “수험생들로 하여금 정답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적어도 심각한 장애를 줄 정도”라며 언급하면서 “이 사건 문제는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 평가 지표로서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