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22학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대해 전원 정답 처리를 하기로 했다. 법원의 소송 1심 선고 뒤 나온 조치다. 법원은 이날 해당 문항의 오류를 인정하고 “정답을 5번으로 결정한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평가원은 판결에 항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수능 출제 오류는 이번이 7번째이고 문항으로 따지면 9번째 오류다. 평가원은 문항의 오류를 조기에 인정하지 않아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강태중 평가원장은 판결 선고 뒤 “법원 판결을 무겁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서 사퇴의사를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부장판사 이주영)는 15일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이 평가원을 상대로 낸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문제에서 제시한 조건을 사용해 동물 집단의 개체 수를 계산할 경우 특정 유전자형의 개체 수가 음수(-)로 나타난다”며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일 수 없어 이 문제에는 주어진 조건을 충족하는 집단 Ⅰ·Ⅱ가 존재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상황에서 정답을 5번으로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에 명시된 조건 일부 또는 생명과학의 원리를 무시한 채 답을 고르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원, 초고속 판결…평가원장 사퇴
법원의 선고는 응시생들이 소송을 제기한지 13일 만에 이뤄졌다. 입시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판결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 행정소송 1심 처리 기간은 본안 소송이 평균 291.4일 걸렸다.
강 원장은 이날 “우선, 수험생과 학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국민께 사과드린다”며 “이번 일의 책임을 절감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평가원은 대입전형의 일정에는 더 이상 혼선이 일지 않도록, 남아있는 2022학년도 대입전형 절차를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원은 문항 오류 지적이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지난달 29일 “문항의 특성상 정답을 고를 수 있다”며 ‘이상 없음’ 판단을 내렸다. 오류는 있지만 정답을 고르는데 문제는 없다는 태도였다.
이후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9일 과목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낸 집행정지 신청에서 수험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집행정지 신청 사건에서 문제의 오류에 관해 직접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건의 중대성 및 문항의 오류가 인정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법조계에서는 본안 소송에서도 법원이 수험생 측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왔다.
평가원은 법원의 집행정지 신청 인용에도 곧바로 전원 정답 처리 처분을 하지 않았다. 평가원은 지난 10일 생명과학Ⅱ 응시생 6515명에게 배부한 성적표에서 해당 과목은 공란으로 제공했었다. 수시 합격자 발표 마감일도 16일에서 18일로 연기됐었다.
세계적 석학도 문항 오류 지적
문항과 관련한 논란이 계속되자 집단유전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석학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항에) 수학적 역설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제자인 박사 과정생 매튜 아기레 연구원의 풀이를 공유했다. 아기레 연구원은 “이 집단유전학 문제는 한국의 SAT(수능)에 출제된 것”이라며 “정말 어려운데 사실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평가원이 사태를 조기에 해결하지 않아 세계적인 망신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법원은 수험 일정과 관련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당초 오는 17일로 예고됐던 판결 선고를 15일로 앞당겼다. 이날 1심 선고에서 재판부는 “만약 정답을 5번으로 유지하면 수험생들은 앞으로 수능 과학탐구 영역에서 과학 원리에 어긋나는 오류를 발견해도 출제자의 실수인지 의도된 것인지 불필요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평가원은 문항의 오류를 조기에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입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법원의 집행정지 신청 인용에도 곧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도 안일한 대응이었다는 지적이다.
수능 출제 오류 이번이 7번째
법원이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평가원이 전원 정답 처분을 내리면서 수능 출제 오류는 이번이 7번째를 기록하게 됐다. 수능에서 ‘복수 정답’ 또는 ‘정답 없음’이 인정된 것은 2004학년도, 2008학년도, 2010학년도, 2014학년도, 2015학년도, 2017학년도에 이어 이번이 7번째고 문항으로는 9번째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수능 문제 오류 9건 중 5건이 과학탐구영역에서 발생했다. 과탐 중에서는 생명과학Ⅱ가 이번까지 2건이며 물리Ⅱ 2건, 지구과학Ⅰ이 1건이다. 그밖에 세계지리와 한국사, 국어, 영어가 각 1건이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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