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스토킹 피해 탓에 신변 보호를 받던 30대 여성이 서울 중구에서 살해된 데 이어 또다시 신변 보호를 받던 여성의 가족이 피살됐다. ‘김태현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스토킹처벌법이 도입돼 시행된 지 두 달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해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전날 신변 보호 대상자인 A씨(21)의 모친(49)을 살해하고, A씨 남동생(13)에게 중상을 입힌 이모(26)씨에게 살인·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11일 밝혔다.
경찰은 전날 이씨를 현행범으로 붙잡아 유치장에 입감해 조사 중이다. 그는 송파구 잠실동 한 빌라 4층에 들어가 A씨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범행 당시 A씨는 집에 없어 화를 면했다. A씨는 지난 6일 이씨를 성폭행 혐의로 다른 지역 경찰서에 신고했고 이튿날 신변 보호 대상자로 등록됐다. A씨는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함께 거주하는 가족들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어 범행을 피하지 못했다. 성폭행 수사 나흘 만에 벌어진 참극이다.
A씨의 아버지는 아내와 통화를 하던 중 사고를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5분 뒤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모자(母子)는 쓰러진 뒤였다. 모자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어머니는 숨을 거뒀다. 남동생은 치료를 받고 있으나 출혈이 심해 상황이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인근에 숨어있던 이씨를 발견해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검거 당시 별다른 저항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성폭행 신고를 당한 뒤 앙심을 품고 보복범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범행 동기를 추궁하고 있다.
앞서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될 당시 신변 보호 조치가 실질적으로 피해 당사자에게만 적용돼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함께 거주하는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인 지인에게도 보복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상 보호막이 없다는 취지였다. 경찰의 신변 보호 지침에는 보복 우려를 검토한 후 가족, 친족, 주변인도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적시돼 있긴 하지만 한정된 스마트워치 기기, 예산 부족, 인력난 등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 가능성’만으로 입감 조치 등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할 수 없는 스토킹처벌법의 맹점도 지적된다. 실제로 이씨의 경우 스토킹이 아닌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까지 이씨에 대한 스토킹 관련 신고내역은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긴급응급조치, 잠정조치 등 스토킹처벌법에 따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피해가 예측돼도 스토킹의 반복성과 지속성을 입증할 수 없다면 물리적 조치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 실질적인 피해를 고려한 법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