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무형문화재 23호 고법(북,장구) 예능보유자 조경곤씨는 지난 2013년 4월 30일 시각장애인 최초로 인간문화재가 됐다.
그는 1967년 1월 6일 전북 김제 출신으로 단돈 1만5000원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우여곡절 을 거쳐 현재 인천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전통 음악 예술을 보존 및 전승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구체적 활동분야는 판소리와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의 노래에 맞추어 북과 장구로 반주를 하는 영역이다.
조경곤 고수는 28일 자신의 국악인생 50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고수라고 하지요. 세계 국내 유일무이 최초 북,장구 문화재입니다. (전국적으로 북 문화재는 있어도 장구 문화재는 처음이지요.) 2013년 4월 30일 북 문화재 2019년도에 장구 문화재까지 합하여 명실공히 고법(북,장구) 조경곤 문화재가 탄생된 것이죠.”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격투기 등 몸을 쓰는 운동을 많이 하다가 그만 눈에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 부상으로 녹내장 후유증이 생기고 망막 박리가 되어 30대 초반부터 빛을 잃어가 실명에 이르렀죠. 현재는 빛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무형문화재 고수가 되었을까요.”
“특히 전통 음악 북,장구 장단을 치는 고수는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소리꾼의 입모양을 정확하게 봐야 합니다. 호흡도 감지하며 박자를 맞춰야 하고요. 모든 전통음악 분야의 전체가 제 머릿속에 있어야 하고 저의 모든 감각이 소리꾼이 지금 어떻게 부를 것이다 라는 것을 1초만에 감지해야하며 반주를 해야합니다. 때로는 소리꾼이 실수를 해도 제가 미리 알고 맞추어 친 적도 있지요.”
“이러한 상황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그야말로 머리카락이 반 이상 탈모되고 무릎과 가슴에 멍이 들고 손바닥에 피가 나고 까지고 하는 인내의 시간들이 있었어요. 하루 10시간 이상 북과 장구를 치며 홀로 연습을 해본 사람만이 그 인내의 시간들을 알 수 있죠. 분명한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시각의 장애를 입고 이토록 몸부림치는 시간들을 보내는 사람은 더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처음 서울에 올라와 서초동 꽃마을 비닐하우스 집에 들어가보니 쥐가 왔다갔다 하고 겨울에는 그릇에 물이 얼어있고 물과 전기가 들어오지않는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견뎌야 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고수의 최고점에 올라야겠다는 꿈을 거머쥐었습니다. 저에게 남아있는 잔존 능력은 국악이었습니다.”
“저의 집안 큰 아버지와 아버지의 노래하는 소리와 북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저는 자연스레 국악문화권에 있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저의 6세 때 어린 나이에 저희 집에 놀러오셔서 소리하시고 북을 치시던 국악인들의 음악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져 재미있게 감상하곤 했었습니다. 성장하여 국악인은 배고프니 하지마라는 부모님과 큰아버지의 만류를 들었지요. 부모님 몰래 용돈을 모아 유명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소리의 세계를 배우다가 큰 무대와 선생님이 계시는 서울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올라가는 차비 만오천원만 가지고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결심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만해도 혼자서 더듬거리며 다닐 수 있는 정도였기에 물어물어 기차를 탄 것이지요. 이후 저는 빛도 볼 수 없이 완전히 실명에 이르렀습니다.”
“비닐하우스 근처 공사장을 지날 때에 건물 지하시설을 위해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졌다가 살아나왔고 국립국악원에 가서 배우기 위해 지하철을 더듬거리며 타고 다니다가 지하철 철도로 떨어져서 죽을뻔한 일 구사일생의 순간들이 몇 번 있었지요. 비닐하우스에 수도시설이 안되어있어서 근처 건물 화장실에서 물을 떠오고 머리를 감고 다녔어요.”
“일반인들은 좀 고생스러워도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눈이 안보이는 제가 이러한 일을 혼자 겪으며 다닌다는 것은 순간순간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 왼쪽 눈썹 끝에 숯이 좀 빠져있는데요 부딪혀 꿰매는 사고가 여러 번 난 영광의 상처입니다. 지금도 몇 년에 한번씩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해서 응급실에 가서 꿰매곤 했죠.”
“서울 올라와서 장구를 연습하던 시절, 건물 옥상에 가서 겨울에도 찬바람을 맞으며 연습을 하였죠. 인적이 없는 산에 가서도 북을 쳤어요. 주변 이웃들에게 소음 방해를 주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장애 중에서도 가장 극복하기 힘든 장애가 시각장애인입니다. 눈으로 보는데서 많은 정보를 얻고 느낌을 가지며 살아가기 때문이죠.”
“저는 시각장애인으로 제 인생이 바뀐 후 시각장애인 무형문화재가 되어 매우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즘같은 힘든 시기에 희망과 꿈을 잃지말고 다소 고통에 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여 살자는 당부의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국악 인생 50년 인생스토리가 담긴 제자발표회는 오는 12월 17일 오후 2시 인천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2층 풍류관에서 열린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