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류는 아무리 어려운 시기에도 중단해선 안 됩니다. 국가 간 정치·경제 등 여러 이슈에도 불구하고 문화교류 덕분에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로 불리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68)가 23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2년 만에 서울에 다시 오게 돼 기쁘다”며 이같이 말했다.
게르기예프는 2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마린스키 스트라디바리우스 앙상블의 첫 한국 공연을 위해 내한했다. 게르기예프의 주도로 2009년 창설된 마린스키 스트라디바리우스 앙상블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현악 수석 단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마린스키 극장의 정예 연주단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 예술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곳으로 오케스트라, 오페라단, 발레단을 전속단체로 거느리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시아 방문은 지난해 11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일본 투어에 이어 이번 서울 공연이 두 번째다. 원래 지난해 빈필의 아시아 투어에 일본 다음으로 한국 공연이 있었지만 취소됐었다”면서 “올해도 불과 2~3주 전에 한국 공연이 가능하다는 최종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은 러시아가 매년 각국을 돌아가며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러시아 시즌’의 일환으로 열린다. 당초 올해 한·러 문화수교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미뤄지다가 축소돼 지난 10월 2일부터 열리고 있다. 이번 내한 공연을 위해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스트라디바리우스 앙상블 단원 40여명은 중앙방역대책본부가 지정한 격리시설에 입소한 후 PCR 검사를 받았으며, 전담 주치의를 두는 등의 방역 수칙을 지키는 조건으로 2주 자가격리를 면제받았다. 게르기예프는 “한국 공연 이후 12월엔 오스트리아 빈에서 3개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빈의) 코로나19 상황 악화로 진행될지 아직 미지수”라고 걱정을 드러냈다.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 출신인 게르기예프는 23살 때인 1977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78년 마린스키극장 오페라 부지휘자로 커리어를 본격 시작한 그는 88년 마린스키극장 오페라 및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 됐다. 80~90년대 구 소련의 개방과 붕괴 등 혼란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으로 마린스키 극장을 굳건히 지킨 그는 96년부터 총감독까지 맡고 있다. 러시아의 절대 권력자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 아래 마린스키 극장(본관)의 개보수와 신관을 신축하는 수완을 보여줬다.
“마린스키 극장은 3개의 공연장을 가지고 있는데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대규모 무대에서 열리는 콘서트와 오페라 모두에 익숙합니다. 극장의 위상은 이런 전속 오케스트라의 수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앞으로 한국에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만이 아니라 발레와 오페라의 공연도 자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게르기예프지만 코로나19를 이길 수는 없었다. 지난해 3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공연 도중 봉쇄에 직면한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마린스키 극장의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 마린스키 극장에선 그동안 확진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꾸준히 공연을 이어왔다.
“코로나19 여파로 러시아 문화예술계도 타격을 입었지만 예술가들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마린스키 극장의 경우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관객과 만나는 공연은 줄어들었지만 마린스키 극장에선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만들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쉬면 기량이 줄어들었는데, 저희 단원들은 오히려 더 많은 작품을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한 알렉세이 레베데프 ‘러시아 시즌’ 준비위원장은 “게르기예프의 리더십 덕분에 팬데믹 상황에서도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직장을 잃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한편 게르기예프는 열 손가락 지휘를 하거나 이쑤시개 같은 작은 지휘봉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가 열두 손가락이 있었다면 열두 손가락을 썼겠지만, 열 손가락밖에 없어서 열 손가락을 다 활용하고 있다”고 웃었다. 이어 “만약 큰 지휘봉을 사용했다면 연주자들의 주의를 방해했을 것”이라며 “음악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건 지휘자의 눈빛과 표정”이라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