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도피를 위해 연인에게 휴대전화 개통과 은신처 마련 등을 요구한 피고인에게 범인도피교사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피를 위해 타인의 도움을 요청한 것도 처벌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1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1월 절도 등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부산구치소에서 복역하던 중 악성고혈압 등을 이유로 1개월간 형집행정지 허가 결정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석방되고 나서 형집행정지 연장 신청을 했다가 형집행정지 종료 3일 전 불허 통보를 받고 잠적했다. 이후 A씨는 당시 연인이었던 B씨를 시켜 아들 명의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은신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도주 40여일 만에 B씨 모친 집에서 검거됐다.
1심 재판부는 “연인을 교사해 형집행기관의 추적을 받던 자신에게 새로운 휴대폰과 거주지를 제공토록 해 범인인 자신을 도피하게 했다”며 “국가형사사법 작용의 적정한 행사를 침해하는 범죄로 그 죄가 가볍지 않다”고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1심 판단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처벌되지 않으므로 범인이 도피를 위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역시 도피행위의 범주에 속하는 한 처벌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범인의 요청에 응해 범인을 도운 타인의 행위가 범인도피죄에 해당하더라도 마찬가지”라며 “원심판결에는 사실오인 또는 범인도피교사죄의 성립요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에 범인도피교사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2심 판결이 옳다고 봤다.
구승은 기자 gugiz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