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불가토큰(NFT) 콘텐츠에서 주목할 건 가격이 아닙니다. 맥락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낙찰가보다 중요한 건 재미입니다.”
‘복면의 래퍼’ 마미손이 대체불가토큰(NFT) 콘텐츠 시장에 미술작가로 데뷔했다. 마미손의 첫 디지털 콘텐츠 ‘수플렉스 더 트로피(Suflex the trophy)’는 지난 14일 디지털 자산 수집 플랫폼 파운데이션에서 11.1818ETH를 제시한 경매 입찰자의 소유로 결정됐다. ETH는 암호화폐(가상화폐) 이더리움 1개를 나타내는 단위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의 낙찰 당시 이더리움 시세를 환산한 가격은 5만 2068.72달러. 우리 돈으로 6141만5055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온라인에 올린 그림 한 장이 수천만원이라니. 그야말로 ‘잭팟’을 터뜨린 셈이다. 하지만 마미손이 누구인가. 실체인 그 ‘누군가’는 래퍼 경연프로그램 탈락 직후인 2018년 9월 분홍색 복면을 뒤집어쓰고 불쑥 튀어나와 ‘악당’(심사위원)들에게 반격을 선포했다. 그 패기가 대중의 호응을 일으켜 ‘부캐’(제2의 캐릭터) 열풍을 몰고 왔다. 마미손이 쓴 복면은 다양한 자아를 끌어내는 ‘멀티 페르소나’인 동시에 위기 상황에서 전세를 뒤집는 반격을 상징한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는 지난 3년간 마미손의 행보를 한 장의 그림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온라인에서 불법 복제가 쉬워 ‘공짜’로 전락할 뻔했던 디지털 콘텐츠는 최근 NFT 시장의 활황을 타고 가치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상화폐 가격 등락에 따른 NFT의 가치 변동성에 있다. 하지만 마미손은 이번에도 빨랐다. 게임업계를 제외한 콘텐츠 생산자 상당수가 가상화폐 폭락을 걱정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마미손은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고 NFT 경매에 부쳤다.
마미손은 NFT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지난 18일 만난 마미손은 NFT 디지털 콘텐츠의 개념과 목적을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했다. 언제나 그를 움직였던 감정.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바로 “재미”다.
-마미손에게 NFT란 무엇인가.
“NFT를 처음 접한 곳은 지난 2월 중순쯤 클럽하우스다(팔로워끼리 육성으로 소통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기업인이나 연예인과 대화를 할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NFT가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한 달가량 기사를 찾아보고 공부했다.
NFT를 알아갈수록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 정치인의 역사적 행보와 업적, 운동선수의 대기록 달성 순간, 이런 것들을 디지털화하고 가치를 매기는 게 NFT에선 가능하다.
대통령이나 노벨상 수상자의 무덤도 NFT 콘텐츠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창의력만 발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생각까지 도달하니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NFT에서 콘텐츠의 가격은 살아있는 창작자의 행보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그 점도 NFT 콘텐츠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다. 나에게 NFT란 결국 재미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는 어떻게 탄생했나.
“NFT를 처음 접했던 지난 2월만 해도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할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안테나’(촉)만 세우고 있다가 마미손의 등장부터 음악까지 모든 행보를 ‘밈’(meme·인터넷상의 문화 요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FT에서 핵심 키워드는 바로 ‘밈’이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트로피였다. 프로레슬링 기술 수플렉스를 활용해 트로피를 디지털 콘텐츠로 만들었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를 파운데이션이라는 플랫폼에 내놓고 판매한 덕에 미술작가로 데뷔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을 재미로만 여기는 것은 아니다. NFT에서 나를 소개할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을 행동하길 좋아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전위예술을 기반으로 한 현대미술의 한 종류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가 거액에 낙찰될 줄 알았나.
“주목할 것은 가격이 아니다. 맥락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NFT에서 재미가 없으면 디지털 콘텐츠가 아니라 가상화폐 ‘펌핑’(가치와 무관하게 가격을 올리기 위한 집중 매수)용으로 전락한다. 물론 이더리움 가격을 올리기 위해 NFT로 ‘고래’(가상화폐 시장의 큰손)들이 활동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창작자들이 적극적으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지금의 현상에 더 주목해야 한다.
사이버펑크 작가 ‘갈리에라’가 있다. 그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다. 최근 3개월간 NFT에 출품한 작품들이 10억원가량의 가치로 인정됐다. 일러스트레이션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부여해 스토리텔링을 병행하고 있다. 언론도 NFT에서 시도할 것들이 많다. 역사에 남을 특종, 당장은 유명하지 않아도 후대에 재평가될 인물과 인터뷰를 NFT에 올리는 방식이 있겠다. 그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NFT에서 가치를 평가받는다.”
-그래도 6000만원에 낙찰됐을 땐 기분이 좋지 않았는가.
“당연한 이야기를…. 짜릿했다. 무엇보다 ‘나도 이제 미술작가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 활동을 하는 어머니에게 ‘나도 현대미술 작가가 됐다’고 자랑했다.”
-입찰가는 어떻게 책정했나.
“1ETH 이상의 가치는 매겨야겠다고 생각했다. 0.1ETH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1.81818EHT를 가격으로 써냈다.”
-‘수플렉스 더 트로피’를 사들인 사람은 누구인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구매한 분이 내 SNS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스타트업 관계자라고 소개했다. 그에게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파운데이션이라는 플랫폼에선 경매의 경합 과정을 볼 수 있다. 경매 참가자 중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도 있었다. NFT 경매 참가자 중에는 정보기술(IT) 업계 관계자가 많아 보였다.”
-NFT는 결국 가상화폐 기반이다. 두렵지 않았나.
“마미손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자’ ‘애처럼 굴자’ ‘철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탄생했다. 그게 마미손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점이다. 디지털 콘텐츠를 NFT 경매로 부칠 때 두려움은 없었다.
(마미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한 뒤 “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유일하게 두려웠던 순간이 있다. ‘민팅’(minting·디지털 콘텐츠를 블록체인으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큰 비용을 들여야 한다. 가상화폐 기반이어서 그런지 민팅 가격에 변동성이 있다. 한 번의 민팅에 50만원가량을 지불하기도 한다. 파운데이션을 포함한 NFT 플랫폼들은 이 가격이 결국 내려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NFT 플랫폼 관계자들도 민팅 가격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NFT에서 획득한 디지털 콘텐츠 소유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플랫폼 기업에서 NFT 소유자를 증명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트위터에선 ‘셀럽 마크’(신분을 확인한 유명인의 대화명에 붙는 문장)처럼 NFT 소유권을 인증하는 방식을 도입한다고 들었다. 그림이나 영상의 경우 증강현실(AR)과 접목되면 소유권을 증명하고 활용할 방법이 늘어나게 된다. 메타버스도 NFT와 함께 유행하고 있다.”
-메타버스 시장이 활황을 타고 있다. NFT도 더 확산할까.
“메타버스라는 키워드가 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키워드 자체를 촌스럽게 느끼고 있다. 어느 현상을 일정한 사고 안에 가두기 위해 억지로 정의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개념을 정의하면 통제하기 편할 테니까. 메타버스로 불리는 지금의 현상과 공간은 아직 한계를 규정할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NFT 창작자라면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지금 벌어지는 여러 현상을 관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떻게 재미를 추구할까 하는 점만 고민해도 충분하다. NFT를 자본으로만 보면 가상화폐 가격의 등락에 따라 가치 하락도 겪을 수 있다. 그건 창작자들이 손쓸 수도 없는 일 아닌가.”
-NFT에 추가로 출품할 계획이 있는가.
“나에겐 음악 외에도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 요즘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몇몇 미술작가와 NFT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다. 협업도 모색 중이다. NFT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모아 시너지를 내 볼 생각이다. 젊은 NFT 집단을 만들었고, 앞으로 인원이 추가될 예정이다.”
글·사진=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