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명성황후 시해 日외교관 추정 편지

입력 2021-11-16 11:45 수정 2021-11-16 14:14
아사히 신문 디지털 판이 16일 공개한 서한. 이 편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실행그룹의 일원이었던 외교관이 사건 다음 날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히 디지털판 트위터 캡처.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1851∼1895) 시해 다음 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이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가 발송인으로 돼 있는 편지에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신 작성자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시해 실행 그룹의 일원으로 파악됐다.

편지는 모두 8통으로, 명성황후 시해 전인 1894년 11월 17일부터 사건 이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돼 있다.

그는 사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자 편지에선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며 자신이 한 행위를 상세히 썼다.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는 소감도 적힌 것으로 전해졌다.

편지의 수신인은 일본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현재의 나카오카시)의 한학자이며 호리구치의 고향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로 돼 있다.

이 편지는 나고야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77)씨가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으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다.

편지가 원래 보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재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에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김씨는 “사건의 세부(내용)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에 비춰보더라도 본인의 진필로 봐도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면(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해명하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하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실행 그룹의 일본인에게 당시 조선의 재판권이 미치지 않았다.

사건 이듬해 1월 일본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으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면소·석방됐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