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년 남성이 초라한 작업복 차림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투박한 손으로 아직 앳된 여조카의 손목을 잡고 머뭇거리며 어찌해야 할지 망설여 편하게 안정 시킨 뒤 자초지종을 들었다.
누이는 도박과 폭력을 일삼은 남편과 일찍이 이혼하고 혼자서 조카들을 키우다 조현병에 걸렸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누이를 대신해서 조카가 실질적 가장이 되었다. 조카는 14살 때부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험한 일을 해야 했다. 10년 이상 동안 지속되어온 고된 생활 속에서 지쳐가던 조카도 우울증, 불면증, 충동조절장애 등의 증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그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 조카에게 달콤한 유혹이 찾아왔다. 체크카드를 빌려주면 한 달에 200만원을 주겠다는 피싱 문자. 전화를 걸었더니, 자신은 수입주류 도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금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크카드 대여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합법적인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누차 안심시켰다.
경제적 곤궁은 조카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한 달에 200만원’이 자꾸 귀에서 맴돌던 조카는 체크카드를 보냈다. 하지만 들어온다던 돈은 일 원 한 푼 들어오지 않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조카의 꿈은 간호조무사로, 어머니를 돌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꿈이 되었다. 징역형 전과가 있으면 간호조무사가 되기 어렵다.
사무실에 찾아온 50대 중년 남성과 누이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 다정했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누이와 조카들을 돌봐왔다. 그는 20년 넘게 석재 일을 했다. 처음에는 공사판에서 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찾아주어서 제법 돈도 모았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2억3000만원의 부도를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친구에게 8000만원 사기를 당했다.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아서 빚 일부를 갚았다. 그리고 8년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매달 200만원씩 빚을 갚아야 했다.
빚 갚으며 자신과 누이의 가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버스비가 아까워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던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 사이 정작 자신이 병드는지는 몰랐다.
조카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외삼촌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리라. 그가 조심스럽게 조카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에 꽁짜는 없는 법이여...니가 누군지도 모르는디 그렇게 쉽게 200만원씩이나 주겄냐. 너도 아다시피 이 삼촌도 한 달에 200만원씩 빚 갚을라고 얼마나 고생혔나. 8년이여 8년. 버스비가 아까워서 걸어다니며 죽을똥살똥 일해서 모아야 간신히 200만원 모을 수 있었잖여. 다시는 꽁짜바라지 말어라”
그리고 “변호사님, 이 아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엉뚱한 일을 벌였구만요. 깊이 반성하는 모양인게 잘 좀 살펴주이소. 야가 간호조문산가 먼가 혀서 지 애미 보살필 수 있게꼬롬 잘 좀 부탁혀요.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구만요”
다시 조카의 손목을 잡고 나가는 그의 등은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진 듯이 굽어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오랫동안 간암으로 고생했던 그는 잘해결된 조카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