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라면 7수도 하죠” 정시 확대에 수능 또 본다 [이슈&탐사]

입력 2021-11-15 00:05 수정 2021-11-15 00:05

수험생의 대입 지원 경향은 최근 수년간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취업에 유리한 곳에 지원하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재수, 3수, 그 이상을 해서라도 취업 잘되는 대학, 학과에 가겠다는 것이다. 교육부가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추진한 수능 중심의 정시 전형 확대는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다. 공정성을 높인다는 명분의 교육 정책이 수능에 유리한 재수생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오는 18일 수능을 치르는 대학 4학년생 송서영(22)씨는 이번이 네 번째 수능이다. 그는 재수로 서울의 한 대학 공대에 입학한 뒤 한 차례 더 수능을 봤다.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계속 대학을 다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지난여름 휴학했다. 수능을 한 번 더 치르기로 한 것이다. “지금 전공은 적성에 맞지 않아 그쪽으로 취업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늦었지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송씨가 가려는 학교는 이른바 SKY대학(서울·연세·고려대) 중 한 곳이다. 대학 졸업 뒤 로스쿨에 진학해 법조계에 진출하는 게 목표다. “사회적 위치, 연봉, 직업 전망, 적성을 다 따져보니 전문직인 변호사를 목표로 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가능한 한 더 높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재수는 불안에서 비롯된 시간 투자”
한 수험생이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13일 앞둔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종로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전문가들은 뒤늦게 재수를 해서라도 대학과 학과를 ‘리셋’하려는 근본적인 동기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보고 있다. 경기도교육연구원은 재수 경험자 19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를 담은 ‘대입 N수생의 삶과 문화’ 보고서를 지난 8월 펴냈다. 재수생 증가 현상을 분석한 보고서다. 인터뷰에 참여한 19명은 좋은 삶을 정의하는 키워드로 ‘안정’을 꼽았다.

한 참여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변수에 의해 영향을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 IMF 외환위기 시대가 오든 코로나 시대가 오든… 자영업은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 없이 제 삶은 언제나 일정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태도는 사회에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직업군에 대한 선호가 크다는 걸 의미한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공무원 등 특정 직업군이 인기가 많은 이유다.

보고서를 작성한 엄수정 부연구위원은 “지금 대입 수험생의 부모들은 IMF를 겪은 세대여서 자녀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강조하는데, 수험생 본인들도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삶의 불안정을 느끼고 있다”면서 “학생들 입장에서 좋은 삶은 곧 안정적인 삶이고, 이에 따라 급변하는 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학계열 전공의 인기가 높은 이유도 대학 합격 즉시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안정성 때문이다. 대전의 한 일반고 2학년인 송채은(17)양은 국민일보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엔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의대를 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의사가 되면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2018년 경기도 한 자율형사립고를 졸업하고 3반수(재수로 입학한 뒤 대학에 적을 두고 또 수능을 보는 것)로 지방 소재 과학기술원에 합격한 이중기(가명)씨는 경기도교육연구원 인터뷰에서 “7수 해서 의대 보내주면 저 갈 수 있어요”라고 했다. ‘의치한(의대·치대·한의대)에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N수 증가 요인 중 하나’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공대는 4, 5수 정도 되면 나이 때문에 (취업에) 발목을 잡히기도 하는데 의치한은 6수를 하든, 7수를 하든 가기만 하면 전문 자격증을 얻고 돈도 더 많이 버니까 가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취업이 보장된 전문직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있다. 지난해 전체 4년제 대학의 중도탈락학생 비율은 4.63%로 2007학년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같은 해 SKY대학 중도탈락학생 수도 1624명(재적학생 대비 2.1%)으로 역대 최대였다.

취재팀이 자문을 받으려 연락한 한 대학교수는 세 자녀가 한꺼번에 이번 수능을 치른다는 지인 A씨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년퇴임을 앞둔 A씨의 첫째는 현직 교사이지만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능을 다시 본다. 항공업계에서 일하는 둘째도 ‘비행기만 타면 멀미가 난다’며 대학 재입학을 계획하고 있다. 셋째는 고3이다. 첫째와 둘째는 ‘인생이 긴데 원치 않는 직업을 평생 가져갈 수 없다. 좋은 대학에 합격해 나를 완전히 재포장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생들은 중소기업에서 평생 낮은 급여를 받고 살기보다 인생의 몇 년을 더 투자해서라도 연봉이 높은 직장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며 “직업 간 격차가 재수생 증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시 확대로 재수 열풍 더 거세져

이런 상황에서 정시 선발 인원 확대를 골자로 하는 교육부의 2019년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은 재수 열풍을 더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교육부 방안에 따라 2023학년도부터 서울 소재 16개 대학의 정시 선발 비율이 40% 이상으로 확대된다. 16개 대학 중 9곳은 이미 올해(2022학년도)부터 정시로 40% 이상을 뽑는다.

입시 현장에서 느끼는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은 명목상 퍼센티지보다 더 크다. 대학은 수시 전형에서 뽑지 못한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므로 실제 정시 선발 인원은 40% 이상이라는 것이다. 종로학원하늘교육에 따르면 주요 21개 대학의 지난해 수시 이월 인원은 정원 대비 평균 3.2%였다. 특히 연세대는 수시 이월 인원 비중이 5.6%였다. 이 대학은 올해 44.1%를 정시로 선발할 계획이다. 지난해 수시 이월 비중을 적용해보면 실제 정시 선발 비중은 49.8%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문민식 세종시 세종고 교감은 “정시 비중이 30%였을 때도 서울의 한 상위권 대학은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높여서 40~50%를 정시로 선발했다”면서 “명목상 40% 비중을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정시로 뽑힐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에서는 정시 확대의 부수 효과를 이미 체감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교사단체 ‘좋은교사운동’의 정책위원인 김진훈 서울 숭의여고 교사는 “기존에 수시에서 합격했다 하더라도 (재수로) 다시 한번 대학 수준을 높여보려는 아이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교실에 혼란이 생겼다는 교사들도 많다. 전국진학지도협의회(전진협) 사무국 간사를 맡고 있는 백상민 경북 문명고 교사는 “그동안 교육과정에 맞춰 수능과 직접 관련 없는 과목을 개설해 소개했는데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걸려 있는 전형이 늘어나고 학생부종합전형이 줄어들면서 학생들이 헷갈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로서는 학교 수업 준비와 수능 준비 두 가지를 다 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 흥덕고 3학년 부장 김성식 교사는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는 상황에서 수능과 고교학점제는 맞지 않는다. 고3 수업은 수능을 감안해 파행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 수능 준비를 안 시켜줄 수 없지 않으냐”고 했다.

사교육 의존도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진훈 교사는 “학교는 학교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수능 점수 올리는 데 있어서의 경쟁력은 아무래도 사교육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진협 회장을 맡고 있는 박정근 수원 호매실고 교사는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학원에 가서 필요한 수능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게 더 유리한 상황이 되면서 자퇴하는 학생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학령인구 감소도 오히려 재수 열풍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위권대 입시 경쟁이 덜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재수에 뛰어드는 수험생이 많다는 것이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그만큼 입시 경쟁이 줄어 상향 지원해도 합격할 가능성이 늘었고 ‘다시 한번 해서 더 높은 대학에 가보자’며 재수하는 학생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남윤곤 메가스터디 입시전략연구소장도 “수험생 입장에서는 고3 때에 비해 경쟁률이 줄어드니 환경이 재수하기 쉽게 바뀌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생 수는 지난해 133만7312명에서 올해 129만9965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이슈&탐사팀 권기석 박세원 이동환 권민지 기자 o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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