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규는 ‘문자 그대로’ 전방위 뮤지션이다. 한국 인디밴드 1세대를 대표하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베이시스트인 그는 대중음악, 국악, 영화, 드라마, 연극, 무용 등을 넘나들며 작곡가, 음악감독, 프로듀서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 ‘범 내려온다’로 조선힙합 열풍을 일으킨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 겸 리더로서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영화음악으로 100편 이상 작업했다. ‘반칙왕’ ‘복수는 나의 것’ ‘도둑들’ ‘타짜’ ‘황해’ ‘은밀하게 위대하게’ ‘곡성’ ‘부산행’ 등 수많은 히트작은 물론이고 여러 실험영화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런 그가 놓지 않고 있는 것이 무용 및 연극 음악으로, 연간 여러 편 작업한다. 11월에만 국립극단의 ‘더 나은 숲’(10월 29일~11월 21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국립무용단의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11월 11~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인천시립극단의 ‘갈매기’(11월 27일~12월 5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등 3편이 잇따라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 8일 국립극장에서 만난 장영규는 “연극과 무용 작품에서 음악을 따로 떼어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중요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면서 “연출가나 안무가가 작품 속에서 할 수 없는 지점을 음악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92년 안은미와 작업하며 뮤지션으로 본격 출발
무용과 연극 음악 작업에 대한 장영규의 애정은 음악감독 및 작곡가로서 출발점이 무대였던 것과도 관련 있다. 1992년 안무가 안은미와 처음 작업한 ‘아리랄 알라리요’를 계기로 그는 뮤지션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안은미는 LP판 12개를 던져주며 “공연에 쓸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그가 곡들을 자르고 붙여서 만든 1시간짜리 음악은 안은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생일선물로 기타를 받은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 밴드 활동을 했어요. 음악을 좋아했지만, 당시엔 대학에 실용음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 권유로 중국어학과로 진학했는데요.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밴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대학을 졸업했죠. 취업을 고민할 때 사촌 누나의 친구였던 안은미 씨가 공연에 쓸 음악을 주문했어요. 그러면서 가수들의 공연 세션을 맡거나 밴드를 하는 등 음악을 직업으로 가지게 됐습니다.”
장영규는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사촌 누나를 통해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 혹은 지망생들과 어울려 다녔다. 이 그룹엔 먼 훗날 각자의 분야에서 거장이 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 안은미를 비롯해 설치미술 작가 최정화와 이불, 영화감독 이재용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사촌 누나는 설치미술 작가, 영화미술 감독, 무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게 되는 이형주다. 이 모임이 확장되며 장영규는 홍대 미대에 다니며 퍼포먼스를 하던 백현진과 어린 나이에 국악계 스타가 됐던 작곡가 겸 연주자 원일도 만났다. 그리고 장영규, 백현진, 원일은 1994년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를 결성하고 기괴하면서 음울한 사운드로 전설이 된 1집 음반 ‘손익분기점’을 냈다. 원일이 빠지면서 ‘어어부 프로젝트’로 이름을 바꾼 백현진과 장영규는 지금까지 함께 또는 따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젊은 시절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예술에 대한 눈이 뜨였다고 생각해요. 국악과 관련해선 홍대 부근 원일의 스튜디오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나중에 비빙, 씽씽, 이날치 작업으로 연결됐습니다. 이런 만남이 결과적으로 제 음악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소리의 해체와 조립은 장영규 음악의 특징
사실 장영규를 대중적으로 알린 건 영화음악이지만, 무용과 연극 등 무대 음악은 장영규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다지는 축이 됐다. 특히 무용 음악은 소리의 해체와 조립이라는 실험적 스타일로 정평이 난 장영규 음악의 출발점이 됐다.
“연극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극장에서 육성으로 대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음악 사용에 제한이 많아요. 대사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음악이 개입되지 않으니까요. 이에 비해 신체를 활용하면서 대사가 없는 무용은 음악의 역할이 훨씬 크죠. 무용수와 음악의 관계가 관객에게 바로 보이니까요. 제가 작업하는 무용 음악의 경우 하나의 모티브에서 출발해 전체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인데요. 연습 기간에는 기본적인 리듬만 주고, 안무가 완성되면 그때 최종적으로 곡을 입힙니다. 무용수들이 리듬에 익숙해졌지만 새롭게 더해진 음악(혹은 소리)과 긴장 관계를 이룰 때 분출하는 에너지를 좋아해요.”
안은미와 첫 작업 이후 그에게는 무용 음악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콩쿠르에 출전하는 학생이나 대학로 데뷔작을 준비하는 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안무가들도 점차 그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지금까지 음악을 담당한 무용 작품은 60~70편에 달하는데, 독일 출신의 거장 피나 바우쉬도 포함돼 있다. 또한, 1998년 김종연 연출 ‘머리통 상해사건’으로 연극 음악에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50~60편의 연극 작업을 했다. 연출가 강량원, 박정희, 이성열, 양정웅 등은 그가 오랫 동안 함께 작업하고 있는 파트너들이다.
“안은미 씨가 미국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저와 작업 했는데요. 안은미 씨가 유명해질수록 다른 안무가들로부터 의뢰는 줄더라구요. 제가 무용계에서 안은미의 음악가로 너무 많이 알려져서 그런 거 같아요. 대신 연극 음악 작업이 많이 늘어났는데요. 젊을 때부터 함께 했던 연출가들이 다들 좋은 연출가로 성장한 데다 이들을 통해 또다른 연출가들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용 음악에 이어 무용 연출까지…이번엔 연출 고사
그는 2014년 국립무용단에서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이 안무한 ‘회오리’로 다시 한번 무용 음악에서 실력을 뽐냈다. 국립무용단은 사리넨에게 한국에서 전통음악을 토대로 작업하는 팀 5~6개의 음악을 들려줬는데, 사리넨이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장영규가 이끌던 비빙의 음악이었다. 장영규는 ‘회오리’에서 전통음악의 샘플을 채취한 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신선한 청각적 울림을 줬다.
‘회오리’ 이후 여러 안무가와 작업이 늘어나던 가운데 그는 직접 무용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립무용단이 2015년 무대에 올린 ‘완월’이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비빙의 공연을 가졌던 그는 당시 국립무용단의 강강술래를 보고 윤성주 감독에게 민요 대신 새로운 음악을 더하면 현대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듬해 음악 감독은 물론 연출로 참여하게 된 그는 무용 동작의 연출까지 관여했다. 그는 “음악 작업을 할 때처럼 원형의 동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듯 만들어봤다”고 설명했다.
국립무용단에서 이번에 손인영 감독 안무로 선보이는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샤먼을 중심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인간이 마주하는 소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감정을 내림굿에 빗대 춤으로 표현했다. 음악을 맡은 그는 원래 연출까지 제안받았지만 고사했다. 대신 독특한 비주얼로 호평받았던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 다양한 영상매체에서 미술감독으로 활동해온 윤재원을 추천했다.
“국립무용단이 기존의 스타일과 다른 색깔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여러 작업에서 눈 여겨봤던 윤재원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죠. 윤재원은 비주얼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어요.”
“국악을 원형대로 편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편 그는 11월 3편의 공연 외에 1편의 전시에도 참여하고 있다. 바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2021 타이틀매치-교대’(10월 13일~11월 21일)다. 북서울미술관은 2014년부터 ‘타이틀 매치’라는 제목으로 작가 두 명이 참여하는 전시를 열고 있는데, 올해는 미디어 아티스트 임민욱과 뮤지션 장영규를 초대했다. 장영규의 경우 2010년대 들어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의 형태로 종종 전시회에 초청되고 있다.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전시에 참여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북서울미술관의 대표 전시라 규모가 커서 부담스러웠지만 ‘전통과 배움’이라는 의제여서 참여했다. 오랫동안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작업 하면서 고민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면서 “‘국악한마당’ 같은 방송을 보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초승달, 기와집 등을 배경으로 한다. 요즘 시청자들이 제대로 국악을 원형대로 접한 뒤 좋고 싫음을 판단하기 전에 ‘지루하다’는 편견을 만드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최근 방송의 국악이나 소리꾼 대상 오디션은 국악이 아니라 대중가요를 부르게 한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껍데기만 국악을 가져오고는 국악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밴드 이날치의 경우 소리꾼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팝’을 내걸고 전통음악 시장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고 피력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