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여성 A씨는 올해 초 외국인 B씨와 SNS로 친구를 맺었다. 중동 지역에 파견된 미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B씨는 말끔하고 잘생긴 미국인처럼 행세했다. 그는 한국어로 먼저 말을 걸면서 자신의 사진을 보냈고, 두 사람은 고향과 학교, 가족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수시로 대화를 나눴다. B씨가 쓰는 말이 문법에 맞지 않고 어색했지만, 한글을 쓰는 외국인과 친구가 됐다는 호기심에 A씨는 끌렸다.
3개월가량 SNS로 연락을 주고 받던 B씨는 대뜸 “퇴직금을 한국에 보냈는데 세관에 걸려있다”며 통관비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B씨가 평소 “은퇴하면 한국에서 살겠다”고 여러 번 말해왔던 터라,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수백만원을 보냈다. 얼마 뒤 “통관에 또 문제가 생겨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할 때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B씨가 입국하면 곧 자신이 보낸 돈을 되돌려받을 거라고 믿었던 A씨는 ‘사기 당한 것 아니냐’는 지인 얘기를 듣고서야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에 당한 사실을 알았다.
로맨스 스캠은 사랑을 뜻하는 ‘로맨스’와 신용 사기를 뜻하는 ‘스캠’의 합성어다. 사기 조직은 주로 해외에 거주하는 외국인 전문직을 사칭하며 번역기를 이용해 한국어로 소통했다. ‘은퇴하고 한국에 가면 함께 살자’는 등의 거짓말로 환심을 산 뒤 관계가 깊어지면 통관비, 항공료, 택배비 등의 명목을 대며 돈을 요구했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외교관 의사 해외파병 미군 등으로 가장해 친분을 쌓은 뒤 피해자 24명으로부터 모두 16억7000만원을 가로챈 혐의(사기 등)로 국제 사기조직 일당 14명을 검거했다고 9일 밝혔다. 이 중 10명은 구속됐다.
라이베리아 등 아프리카 출신이 대부분인 일당은 지난 2월부터 지난달까지 피해자들로부터 적게는 100만원, 많게는 수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 대부분은 중·장년층이었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알고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당은 국내에서 인출 총책, 인출책, 대포통장 관리책 등으로 역할을 나눠 ‘작업’을 했다. 이들은 해외에 머무는 조직 총책의 지시를 받아 피해자들이 보낸 돈을 찾아 외국으로 송금했으며, 일부는 생활비나 명품 구입 등에 썼다고 한다.
일당은 돈을 인출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거나 외국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썼으며, 인출책이 검거되면 새 인물을 포섭해 범행을 지속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해외 총책의 인적 사항을 특정, 인터폴에 적색 수배를 요청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