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행정부가 검토 중인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이 미 국방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내년 1월 ‘핵 태세 검토’(NPR)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런 원칙을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데, 국방부가 중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확장 및 고도화, 동맹국들의 반발 등을 내세워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6일(현지시간) 외신 등에 따르면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는 이달 핵무기 정책 검토를 위한 고위급 회의를 소집한다. NSC는 이번 회의에서 NPR 보고서에 ‘선제 불사용’ 원칙이나 ‘단일 목적’(sole purpose) 원칙을 명시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단일 목적은 핵 공격에 대한 억제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만 한정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모두 현재의 전략적 모호성 원칙에서 벗어난다.
미국은 올 초 호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동맹국에 이 같은 내용의 핵정책 변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대부분 국가가 부정적 회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행정부의 핵 정책 변경 지지자들은 선제 불사용 원칙이 핵 긴장을 완화하고 군비 경쟁을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전략적 모호성이 자칫 우발적 핵전쟁을 촉발할 여지도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전략적 모호성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의 핵 억지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들은 핵사용 원칙 변경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도 없다고 주장한다.
폴리티코는 이 같은 현상유지(전략적 모호성 원칙 옹호) 세력들이 국방부의 정책 검토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보도했다. 핵무기 사용 제한 반대론자들이 국방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리티코는 “중국의 놀라운 핵 확장, 러시아의 무기고 현대화는 핵정책 변경이나 감축에 반대하는 군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강화했다”며 “(국방부는) 회의에서 선제 불사용이나 단일 목적 원칙 등을 옵션으로 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국방부 관계자 발언도 보도했다.
미 국방부는 지난 3일 중국이 2030년까지 10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군사력 보고서를 내놨다. 국방부는 보고서를 통해 “최근 군사 문서에 따르면 중국 지도자들은 핵전력을 ‘높은 경계’ 상태로 유지하고, ‘경고 시 발사’ 태세를 도입하는 등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전략적 변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내부에서 핵 선제사용 금지 원칙과 반대로 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무기 전략도 반대론자들의 근거다. 폴리티코는 “지난 1월 바이든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신전략무기감축 협정을 5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전장용으로 설계된 저출력 무기 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를 맡았던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금 상황에서 미국의 핵정책을 바꾸려면 바이든은 펜타곤과 전략사령부의 핵심 보좌관들을 제압하고, 국무부의 유보적 입장까지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행정부 내부에서는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해 정책 변경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거부터 핵무기 선제사용 금지 원칙을 공개적으로 주장해 왔었다. 2017년에는 “미국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해야 할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상상하기 어렵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3월 국가안보전략지침 잠정 보고서에서도 “핵무기의 역할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처럼 매파들의 반발을 고려해 ‘단일 목적’만 명시하는 방안을 우선 추진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선제 불사용 원칙은 동맹국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군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며 “이 문제에 정통한 관계자는 이달 NSC 회의 의제가 ‘단일 목적’ 선언 여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단일 목적 선언은 문구에 따라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공격 옵션을 완전히 제한하지는 않을 수 있다.
다만 이 역시 의회 내 매파세력이 걸림돌이다. 공화당 소속 상원 외교위원회 제임스 리쉬 의원은 “‘단일 목적’의 핵 정책은 ‘선제 불사용’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며 “이런 원칙을 고려하는 것조차 동맹을 완전히 배신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소속 짐 쿠퍼 하원의원도 “모두가 그것(핵정책 변경)을 원하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느냐 여부”라고 했다.
미국의 방대한 핵무기 예산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리어노어 토메로 국방부 핵·미사일 방어정책 담당 부차관보가 지난 9월 사임했는데, 군비 통제 옹호 단체들은 그가 권력투쟁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매파들이 공화당을 통해 그의 사퇴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바이든 행정부의 핵무기 정책을 둘러싸고 워싱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공화당이 제한적 무기사용에 반대하면서 내년 초로 예정된 NPR 보고서와 국방예산이 싸움터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