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빠찬스란 말, 쓰지 마시오!’ 독자의 항의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지난달 초 작성한 ‘이젠 빌라도 엄빠찬스…非아파트 증여 역대 최대’ 기사에 관한 피드백이었다. 기사는 올해 상반기 동안 다세대·연립(빌라), 단독·다가구 증여 건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독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괜한 조어를 만들어서 성실히 일한 부모를 비꼬지 말라”며 부모의 지원을 뜻하는 ‘엄빠찬스’라는 단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해당 기사의 댓글에도 ‘엄빠찬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자식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부모가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나쁜 일로 치부하지 말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불평등이 심화하는 사회적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일 뿐 흥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엄빠찬스’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양극화된 한국사회의 분열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해 다각적으로 분석해봤다.
부동산 ‘엄빠찬스’는 못 참지…사회의 ‘역린(逆鱗)’
부동산 증여와 관련된 엄빠찬스는 갈수록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분노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개인이 투입한 노력보다 부모의 지원이 있어야만 취득할 수 있는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자식 세대는 물론 경제적 지원이 어려운 부모에게까지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민감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부동산 증여 건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의 아파트 거래 현황 통계에 따르면 주택 증여 건수는 지난해 기준 15만2427건으로 집계됐다. 올해 들어 8월까지 전국의 아파트 증여 건수만 총 5만8298건으로 2006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부동산 증여가 합법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국세청은 올해 이뤄진 증여 거래 중 불법 증여로 의심 건수가 9월 기준 4000건이 넘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증여를 둘러싼 사회구성원들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장현 성균관대 교수는 5일 “지금처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시대에서는 부동산을 증여함으로써 막대한 부가 이전된다. 부의 세대 간 이전 현상을 가만히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지고 증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더욱 팽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부동산을 증여하는 부모들도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인지하고 있어 엄빠찬스 같은 신조어를 언짢아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엄빠찬스 단어에 기분 나빠한다는 것은 부모의 부동산 증여를 공정하지 못하다고 보는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면서 “부동산은 우리 사회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자 아픈 지점으로 거주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부동산을 엄빠찬스로 물려받는 것에 대한 분노의 크기도 큰 것”이라고 분석했다.
퇴직금 50억은 받아야지?…스케일 커지는 ‘엄빠찬스’
엄빠찬스는 부동산 증여뿐 아니라 대학 입시부터 취업까지 다양한 범위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특히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엄빠찬스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청년들의 기대를 단번에 무너뜨리면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최근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대장동 개발 관련 회사인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코로나19 확산세로 취업 시장까지 얼어붙은 상황에서 힘들게 취업 준비를 이어가고 있는 청년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토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곽상도 아들로 못 태어난 게 죄’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곽 의원 아들이 지난달 8일 경기남부경찰청 소환조사를 받고 포르쉐 차량 조수석에 타고 귀가하는 모습은 성난 여론에 불을 질렀다.
엄빠찬스 특혜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인 조민씨다. 조씨의 고려대·부산대 의전원 입학 당시 허위 스펙 논란이 대표적이다. 조 전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는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2심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는 “엄빠찬스로 특혜를 봤다는 논란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옛날처럼 개도국이 아니라 선진국 국민으로서의 자아가 확실한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특권으로 특혜를 누리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경쟁이 심화한 사회에서 공정하게 경쟁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세대들이 이런 용어를 만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엄빠찬스’ 어디서 봤는데…수저계급론의 진화
엄빠찬스는 과거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수저계급론의 연장선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수저론은 부모의 힘, 배경, 재산 등이 2세대로 이어져 자식들이 물고 태어나는 수저의 종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힘들게 노력해도 바뀔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청년 세대의 좌절이 담겼다.
한준 연세대학교 교수는 “자신의 노력으로 현실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 수저론의 결론”이라면서 “이런 운명론적 사고 성향은 노력의 결과에 비관적인 전망을 갖게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용어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부모의 재력과 권력이 자식에게 그대로 대물림 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두 단어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봤다. 이 교수는 “엄빠찬스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저론에서 이어진 이론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회의 불평등은 항상 존재해왔다. 자산의 부익부 빈익빈으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봉합되지 않고 지금처럼 불평등이 지속한다면 수저론, 엄빠찬스를 잇는 신조어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