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 착용을 약속했지만, 실제 이를 사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한 남성이 성폭행 혐의로 캐나다 대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다.
3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캐나다 수도 오타와 대법원에선 이날 콘돔 사용을 약속하고 실제로 성관계를 가질 땐 콘돔을 착용하지 않는 행동으로 성폭행 혐의를 받는 남성 로스 맥캔지 커크패트릭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커크패트릭을 고소한 여성은 2017년 온라인에서 그와 인연을 맺고 같은 해 3월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약 2시간 동안 성관계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 여성은 “당시 ‘콘돔 없이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원칙을 밝혔고 커크패트릭은 이에 동의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은 2018년 커크패트릭의 자택에서 다시 만나 두 차례 관계를 맺었다. 첫 관계는 과거에 서로 합의했던 대로 콘돔을 착용한 상태에서 이뤄졌지만, 두 번째 관계를 가질 때 커크패트릭은 콘돔을 쓰지 않았다.
이 여성은 “두번째 관계를 맺기 전 커크패트릭은 침대 옆 테이블로 몸을 돌려 콘돔을 착용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피임기구 없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성은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콘돔 없이는 성관계도 없다’는 원칙을 밝혔음에도 커크패트릭이 이를 지키지 않았고, 결국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커크패트릭은 이에 대해 “여성이 콘돔을 착용했을 때만 성관계에 동의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맞섰다.
2018년 처음 열린 재판에서 커크패트릭은 ‘여성이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여성은 항소했다. 이에 지난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항소심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새로 심리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대법원 심리에 참석한 커크패트릭의 변호인은 “여성을 속이려하지 않았다”며 “만약 이런 항소가 받아들여진다면 그는 범죄기록을 남긴 채 성범죄자로 등록돼야 한다. 그 결과는 매우, 매우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재판에 소송 참여인 자격으로 출석한 여성 법률지원단체 ‘여성법률교육행동재단’의 케이트 피네이 변호사는 “법이 실생활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콘돔이 있는 관계에만 동의했는데, 콘돔이 없는 성관계를 했다면 이는 계약이 파기된 것이고, 원치 않던 체액에 접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중대한 침해 사례가 이제 법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단체 소속 로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은 동의에 관한 문제”라며 “콘돔이 없는 성관계와 있는 성관계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별도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WP는 이 사건의 재판 결과에 따라 ‘성관계 동의’가 법률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날 재판에선 2014년 ‘구멍 낸 콘돔’ 사건이 언급되기도 했다. 한 여성이 콘돔 사용을 조건으로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는데, 남성이 콘돔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여성이 임신한 사건이다.
이 남성은 성폭행으로 기소됐고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선고됐다. 당시 대법관 다수는 콘돔에 구멍을 낸 행위가 ‘사기’에 해당하므로 여성의 동의는 무효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1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최근엔 성관계 도중 콘돔을 몰래 빼버리는 ‘스텔싱’도 범죄행위로 판단되고 있는 추세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여러 주들 중 처음으로 스텔싱을 민사소송의 대상으로 인정했다. 호주 수도 준주(ACT)는 지난달 스텔싱을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뉴질랜드 법원은 지난 4월 스텔싱 행위를 한 남성에게 강간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