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선택과 참여의 플랫폼을 준비해왔는가

입력 2021-11-04 10:58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한교총 대표회장)



드디어 이번 주부터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른 대중 시설과 달리 교회 내 식당 운영 등에 대한 제재가 있어서 여전히 교회에 대한 불평등이라고 하는 불만의 소리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불만에 충분한 동의를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의 식사를 통하여 감염이 확산될까 하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11월 7일 주일에 얼마나 성도들이 모여들고 예배가 회복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예배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찾아왔을 때 “우리가 로데오 게임을 하려고 했지 않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우리 안에 현장예배에 대한 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데오 게임에서 아무리 카우보이가 안 떨어지려고 해도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떨어진다. 얼마나 오래 버티며, 또 얼마나 기술적으로 떨어지느냐가 중요하지, 어설프게 저항하다 잘못 떨어지면 소에 밟히거나 뿔에 받혀 큰 중상을 입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직면할 위기 분석과 한국교회 세움을 위한 세미나'가 지난해 4월 27일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 예배당에서 열리고 있다. 국민일보DB


정부의 방역조치에 저항을 하고 공격을 하는 분들도 결국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또한 아무리 현장예배를 강행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이 하나 있다. 막상 예배가 회복이 되었지만 전혀 관성의 법칙이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우려다. 혹시나 교회 오는 것을 어색해하고 두려워해서 온라인예배를 드리기를 좋아하는 관성 말이다. 이 관성을 깨는데도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지 모른다.

흔히 코로나19가 비대면 사회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그 앞에 ‘선택적’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선택적 비대면 혹은 선택적 대면이라고 말이다. 나는 코로나19가 ‘선택적 비대면 사회’ 혹은 ‘선택적 대면 사회’를 만들었다고 본다.

예컨대, 주일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학교는 가고 학원은 가는데 교회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장년 성도 같은 경우도 백화점은 가고 마켓은 가면서 교회 오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필수 생활시설이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어떻게 콘도 같은 곳은 자유롭게 가고 문화공연에는 자유롭게 가면서 교회 오는 것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선택적 대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과감하게 선택적 대면환경을 만들어줘야 했다. 당연히 현장예배를 극대화하고 강조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정말 하이브리드 처치를 준비하고 플랫폼 처치를 구축해야 했다. 예배 인원 제한 속에서도 예배를 여러 번 나누어서 드릴 수 있었지 않는가. 나 같은 경우는 주일날 주일예배를 7번 드렸고, 작년 연말 송구영신예배 때는 현장과 온라인으로 8번 이상 드렸다. 또한 자동차 스루를 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 칼빈처럼 찾아가는 예배 시스템을 가동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교황 클레멘트 6세는 공간의 권위를 지키고 믿음으로 흑사병을 이기자고 하면서 성도들을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성당이 집단감염의 진원이 되어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하면서 중세 가톨릭은 몰락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변화의 흐름을 직감하고 발상의 전환을 하였다. 그는 미리 구빈원을 만들어서 사회봉사를 했고 제네바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쿼런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래서 노약자를 비롯하여 감염에 노출이 쉬운 사람일수록 절대로 교회 오지 말라고 하고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칼빈은 예배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 가톨릭은 쇠락해 갔지만,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계속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21장 6절을 보면 평상시는 반드시 정한 장소인 교회에서 현장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비상시에는 장소를 절대화하지 말고 집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지 않는가.

미디어의 역사는 몇 가지 단계로 발전해 왔다. 예수님 당시에는 음성 미디어가 전부였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와서는 필사 미디어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양피지 가죽에다가 성경을 기록하여 그걸 교회에서 읽어 주는 것 자체가 설교였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는 인쇄 미디어가 중심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해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영상 미디어가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영상을 잘 사용하는 교회는 감동과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소셜 미디어와 메타버스 기술까지 사용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나 메타버스는 한 마디로 참여와 공유의 시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온라인 처치를 이루지 못하면 교회는 선교와 전도 전략에 있어서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상 미디어를 통해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 온라인을 통해서 예배의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그 플랫폼의 요소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참여와 체험이다. 즉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예배의 플랫폼에 참여하도록 하고 복음의 능력, 예배의 생명성,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감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상 미디어는 일방향의 콘텐츠만 송출하면 되었다. 한 마디로 현장예배를 그대로 온라인으로 송출하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을 통해서 분명한 영적 가치와 의미를 제공해 주는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판을 만들어주고 터를 구축하는 플랫폼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플랫폼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과 예배,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4차 산업시대에 자신에게 딱 막는 콘텐츠를 찾는 시대와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성도들이 플랫폼 처치를 통해서 예배의 신비감과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현장예배에 못 올수록 더 현장예배를 사모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신비를 이미 체험하였으니 말이다. 세스 고딘의 말을 빌린다면, 이미 그들은 온라인 안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부족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이런 플랫폼의 부족공동체를 이룬 교회는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는 소수의 골수팬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고 거룩한 프로슈머(생산적 소비자)의 집단을 이룬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현장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존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우리는 소통의 방법과 방식의 차이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의 경우를 볼 때 예배의 일방향만 주장하는 목회 현장은, 막상 예배의 자유라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회복 탄력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참여와 체험, 소통과 경험이라는 플랫폼 처치를 이룬 교회는 예배의 회복 탄력성이 엄청 빠르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한국교회도 팬데믹 시기에 얼마나 하이브리드 처치를 이루고 플랫폼 처치를 이루었느냐에 따라서 예배 회복의 상당한 격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부터다. 지금까지는 코로나를 핑계 삼아 예배를 포기하는 목회자도 있었고, 정부의 방역에 대해서 분노하고 누군가를 향해 공격하는 양상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 어쩌면 코로나 이전으로 복귀하려는 목회자와 교회는 과거보다 더 많은 절망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김난도 교수의 ‘2022 소비 트렌드’에 의하면 “2022년도는 코로나 이전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복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도 코로나 이전으로 복귀가 아니라 복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거룩한 플랫폼 처치를 이뤄야 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플랫폼 처치의 특징은 자발적인 참여와 경험이다.

중세와 종교개혁시대에는 인쇄 미디어와 음성 미디어가 하나로 만나버리는 현상이 있었다.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인쇄 미디어와 음성 미디어는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것처럼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이 구별되지 못할 정도의 실감기술을 느끼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예배의 진정한 가치와 본질적 의미를 가르치고 심어주되,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스스로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장과 판의 플랫폼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 교회의 성도들은 더 현장예배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현장예배가 더 빠르게 회복되고 교회가 더 굳건하게 세워지지 않겠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불출석하는 성도들과 이리저리 떠도는 노마드 신자들을 향하여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예배를 스스로 선택하고 참여하게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스위스 신앙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그리고 보여지는 말씀으로 구분했다. 그 보여지는 말씀은 바로 성만찬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눈으로 보고 실감나게 체험하게 하는 말씀은 성만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만찬과 같은 은혜를 보여주고 생명 에너지를 제공해 주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떡과 잔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 예배의 떡과 잔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럴 때 불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은 물론 노마드 신자들까지도 자발적으로 그 떡과 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떡과 잔이 있는 플랫폼 교회에서 엄청난 복음의 능력과 예배의 생명력,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비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김태훈 목사(한주교회)의 주장처럼 당연히 현장예배가 빨리 회복되고 교회는 더 든든하게 세워질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러한 플랫폼 처치를 얼마나 구축해 왔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불출석하는 성도들과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히 교회 안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떡과 잔을 갖춘 플랫폼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