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3일(현지시간) 자산매입 축소(테이퍼링) 시작을 선언했다. 경기 방어를 위해 돈을 풀어왔던 양적완화 시대가 저문다는 의미다.
이번 조치는 유동성 지원 규모를 서서히 줄여나가는 방식이어서 ‘돈 풀기 정책’이 당장 끝나는 건 아니다. 연준은 일단 제로 수준인 금리도 동결했다.
다만 코로나19 팬데믹 회복 과정에서 나타난 인플레이션 속도가 예상보다 가파른 것으로 나타난 데 따른 조치여서 금리인상 시기가 앞당겨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테이퍼링 공식 선언
연준은 이틀간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마친 뒤 성명을 내고 “지난해 12월 이후 경제 진전을 고려해 국채 100억 달러, 주택저당증권(MBS) 50억 달러씩 월간 순자산 매입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기준금리는 현재의 0.00∼0.25%로 동결했다. 지난해 3월 이후 20개월째다.미국은 지난해 3월 팬데믹 이후 경기 회복 지원을 위해 미 국채 800억 달러, MBS 400억 달러 등 매달 120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왔다. 이번 연준 발표대로 매달 150억 달러씩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면 8개월 뒤 인위적 유동성 공급은 ‘제로’(0)가 된다. 연준은 지난달 테이퍼링 기간을 8개월로 하는 구상을 논의한 바 있다.
다만 연준은 이날 “매달 순자산 매입 감소가 적절하다고 판단하지만, 경제전망 변화에 따라 매입 속도를 조정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일단 올 연말까지 두 달간 테이퍼링 진행한 뒤 시장 상황을 지켜보고 규모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인플레이션 압박
연준은 테이퍼링을 시작할 만큼 경기가 소기의 목표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실제 미국 경제는 최근 5개 분기 연속 플러스 성장을 달성하며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그러나 시장 전문가들은 물가상승 속도가 연준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으로 봤다. 연준이나 시장이 예상했던 것보다 인플레이션 속도가 가팔라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식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 인플레이션은 지난 9월 전년 동월 대비 3.6% 상승했다.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는 지난 9월 전년 동월 대비 4.4% 올라 30년 만의 최대폭 급등을 기록했다. 더 큰 문제는 공급망 병목현상이 계속돼 원자재, 에너지, 물류, 인력 등 전방위적 비용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연준도 이날 FOMC 성명에서 “공급과 수요 불균형이 일부 부문에서 상당한 물가 상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자산 가격도 부담이 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펜데믹으로 생겨난 신규 수요, 양적완화로 넘쳐난 유동성이 매매 가격과 임대료를 쌍끌이로 끌어올리며 최악의 부동산 시장을 만들었다. 연준 강경파들은 MBS 직접 매입이 부동산 시장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먼저 줄여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금리인상 빨라질까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테이퍼링을 시작하기로 한 결정이 금리인상을 고려하고 있다는 직접적 신호는 아니다. 금리 인상을 위해서는 별도의 한층 엄격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공급 제약 지속이나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등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인플레이션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그 시기는 매우 불확실하다. 우리는 여전히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파월 의장은 “금리인상은 경제 상황에 달려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대응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 말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것이고, 정책 결정이 적절하게 내려질 것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연준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것과 긴축 정책을 곧 시작해야 할 만큼 매우 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시장에 주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반영하면서도 급격한 통화 정책 변화를 걱정해야 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통화정책 변화의 연착륙을 위해 시장을 안심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수석이코노미스트 폴 애시워스는 “연준은 여전히 물가 급등을 대체로 일시적이라고 주장한다. 비둘기파들이 연준에서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 나스닥 지수 등 미 3대 지수는 동반 상승하며 4거래일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 속도가 금리 인상 결정을 지속 압박할 것으로 보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골드만삭스는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내년 중반까지 지속할 것으로 보고, 내년 7월 금리 인상 시작을 예측했다. 연준이 테이퍼링을 끝내자마자 금리를 올릴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CNBC 방송이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응답자 44%는 내년 7월 연준이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
▶
▶